[용인신문]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 조카는 고모인 나를 잘 따랐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조카를 데려오곤 했다. 어느날 그네를 타고 있던 조카가 손짓을 하는 내게 달려오다가 그만 아이들이 쌓아놓은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나는 뒤돌아보는 조카의 손을 붙잡고 바쁘다며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그런데 7살이었던 어린 조카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아이들에게 갔다. 그리고 모래성을 보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이들은 다시 쌓으면 된다며 사과를 받아주었고, 그것을 지켜보며 나는 오롯이 어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감당해야 했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피폐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노래했던 윤동주의 시심이 가슴을 울리는 것도 바로 ‘염치(廉恥)’를 갈구하는 우리 내면의 순수한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없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박완서 작가가 쓴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소설은 내게 ‘부끄러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박완서 작가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소설에서 중년여성인 화자(話者)를 통해 모처럼 찾아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잘 담아내고 있다. 부끄러움을 통증으로 표현했지만 그 통증은 어쩌면 잃어버린 양심이 다시 살아났음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시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받는 세상인 것 같다. 악한 행동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을 바꾸면서까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양심조차 버리는 행동을 보면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거짓말을 하고 악행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강자에게 힘을 보태는 권력은 세상의 악이 된다. 학교폭력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한 드라마가 세상의 인기를 얻는 것도,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던 가해자를 대신해 용기있는 사과를 선택한 손자의 행보에 박수를 치는 것도 세상에 ‘권선징악’ 있다는 것을 믿고 싶은 약자들의 마지막 희망인 것이다.
사람이 변한 것인지 환경이 그 사람을 변하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감추어져 있던 본성이 드러난 것인지 부끄러움은 그 사람을 바라보는 타인의 몫이 될 때가 많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겸손’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부와 권력은 겸손을 망각시키는 힘이 있고, 그 망각의 힘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은가보다. 세상에서 ‘성공했다’ 라는 말을 듣는다면 ‘사람이 변했다’라는 말도 듣고 있지 않은지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 혹시 그 사과나무가 지금 시대에 필요한 잘못에 대한 ‘사과(謝過)’를 말한 것은 아닐지 괜한 ‘언어유희’를 끄적거려 본다.
세상에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긴다고 해도 그것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양심’이라는 것이 주는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내하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남에게도 내 자신에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가 어린 조카를 통해 배웠던 그 ‘부끄러움’이 아직도 가끔 내 ‘양심’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는 힘들다. 그래도 누군가가 부끄러움을 가르친다면 기꺼이 배우려고 하는 양심조차 잃어버리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지구가 쉽게 멸망하지는 않겠지만 세상을 위해 우리 마음속에 ‘사과(謝過)’할 수 있는 용기를 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