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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불감의 시대… 21세기 대한민국 맞아?

오룡(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용인신문] 아주 오래전인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6.39m 높이에 37t의 거대한 비석은 고구려 역사의 결정체이다. 광개토대왕은 영토확장뿐만 아니라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렸다.

 

비문에 나와있는 내용의 일부이다.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치셨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고구려인의 평가를 고려하더라도 광개토대왕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사랑받은 임금이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누군가에게 맞는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관심도 없는 말이다. 광개토대왕을 알고 있는 국민은 민족을 아는 국민이다. 그렇다고 민족이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다. 역사 속의 우리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들먹였다. 다수의 국민은 기꺼이 국가와 민족을 일체 시키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역사를 모르는 것’과 별개로 병역의 의무에 대해서도 국민 대다수는 충실하게 부역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 기원과 전파>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묘지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징집의 대상인 그들이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국가와 민족을 동일시 한 결과물일 것이다. 징집된 병사들은 여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역사를 조금 알았을 뿐이고 민족을 더 조금 생각한 젊은이들이다.

 

그래도 최근인 2022년까지는. 자기 삶에 영향을 준 책으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고르는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역대 대통령들은 최소한 ‘국가 비전’을 선포했다. 국민의 호불호가 분명했기에 격한 상호 작용은 필수였다. 이 또한 민주주의 발전과 민생경제의 해결을 위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라고 주장 ‧ 변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흔한 ‘국민을 위한’다는 표현도 없다. “이런 것 해보면 어때.”라는 개인의 생각은 ‘완전무결한 지시사항’으로 전락했다. 대통령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론은 무시, 아우성은 외면, 통곡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익 없는 외유를 포장하는 기록자의 수준은 더 처참하다. 기록은 남기는 자의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때문에 나름 신경을 써서 남겨야 한다. 왜냐면 오래 남을 거니까. “인간은 안 변해”와 “인간은 누구나 변해” 사이에 어느 쪽에 가까울까. 대체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많을 것 같다. 누군가를 보니….

 

‘희망적인 미래’는 애초부터 사기다. 시인 기형도가 정리한 표현을 불러온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기형도는 희망을 부숴야 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통치자들(표현상 정치인들)이 말하는 희망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기형도가 살았던 1980년대보다 2023년도에 사는 사람들의 희망은 상상 초월 강렬해졌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글쎄,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를 때가 더 많다,”라는 주장이 확인되는 현실이니까.

 

그래도, 아직 포기할 필요는 없다. 고통의 위력이 남아있다. 살아있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고통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고통을 나누는 것이 연대, 대안은 아니다. 공감과 위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인간이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한, 민족 공동체의 끈이 존재하는 한. 고통에 대한 아우성은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배제와 소외, 갑질, 착취당한 구성원의 고통을, 고통을 당한 자의 등장에 대한 호(好)감(感)을 권력화하는 것이다. 그 권력은 영향력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다수의 인간에게 ‘책임감 백신’의 권력을 부여하면 변통(變通)은 가능할 일이다.

 

- 사족 하나. 범법(犯法)했는데 형사처벌은 고사하고, 사과도 없다. 뉴스도 사라졌다.

-사족 둘. 매우 이상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