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현기영의⟪순이 삼촌⟫을 읽기전에 ‘순이의 삼촌’이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고3 겨울방학에 처음 접한 소설은 이해불가의 내용이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제주 방언에서는 연장자를 성별 상관없이 ‘삼춘(삼촌)’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밭이서 죽은 사름들이 몽창몽창 썩어 거름 이듬해엔 감저(고구마) 농사는 참 잘되어서. 감저가 목침 덩어리만씩 큼직큼직해시니까”
군시절 제주 출신 한 달 선임은 고졸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내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살 흐르는 세월에/그 향기 더욱 진하리. 역사를 공부했다는 난, 제주 4‧3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전역 후, 제주 애월에 살고있는 그를 다시 만났다. 두 살 어린 그가 인생의 선배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의 ‘도그마’를 일깨워 준 스승이었다. “제주는 제삿날이 같다.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른 채 죽었다. 마을 고구마밭에서 한날한시에 대량 학살당했다. 도륙당한 시신이 썩어 거름이 되어 고구마 크기가 베개처럼 컸다. 흉년이어서 먹을 것이 없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차마 고구마를 먹을 수 없었다.”
⟪순이 삼촌⟫과 ‘잠들지 않는 남도’와 제주 출신 군대 선임. 30년이 지난 시간 동안 역사의 끈을 고집스레 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버팀목의 출발이었다.
최근에 일부 정치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며(?) 고해성사 중이다. 이승만 다큐멘터리인 <건국 전쟁>을 통해 역사 공부 제대로 했다고 인증사진을 올린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거의 마무리 된 상황이다. 현대사 인물은 증언과 영상, 다양한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하나만으로 인물에 대해 평가를 끝냈다는 표현을 쓰지도 않는다. 이승만은 4·19혁명에 의해 쫓겨났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며 하와이로 떠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이 유효하다면 이승만은 여전히 ‘불의(不義)’한 독재자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이여, <건국 전쟁>을 보고 이승만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고 자랑하지 말라. 덧붙여서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함부로 권유하는 것도 자제하라. 정론(正論)이 아닌 정론(政論)은 역사가 아니라 당파성이다.
‘충녕대군의 능력을 알아본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하려고 일부러 미친 짓을 했다’라는 글은 17세기 김시양 쓴⟪자해필담⟫에 나온다. 1921년 김형식이 ‘이조인물약전’을 동아일보에 연재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정사(正史)의 기록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에 대한 미화가 대중적으로 퍼진 시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시기와 맞물린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다섯째 서자의 후손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지낼 때 대한제국 ‘Prince’ 행세를 하며 지낸 적도 있지만, 해방 이후 대한제국 황족들의 입국을 거절했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공식 석상에서도 이승만에게 큰절을 올리며 ‘황공스럽다’를 연발했다. ‘낙루(落淚)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가 국방장관으로 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고,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했다.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도 ‘~하옵니다’라는 말을 해서 출세했다는 다양한 자료들이 남아있다. 당시의 경무대는 조선시대 궁중 용어가 난무했다. 일부 정치인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라고 떠받드는 이승만은 전제주의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역사적 인식은 자랑스럽든 창피하든 만장일치가 없다. 구성원 각자가 경험한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너의 경험은 사건이고, 나의 경험은 역사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국민의 역사의식을 편한 대로 바꾸려는 정치인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를 성공의 수단만이 아닌, 속지 않고 살기 위한 도구로 삼아야 할 때이다. 다루기 쉬운 국민으로 취급당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역사 공부 제대로 하자.
사족 하나, 4‧10총선이 중요한 이유. 사족 둘,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이 당선되면, 걸어 다니는 재앙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