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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한자음 탈피 우리말 위주… 조선 최고 ‘국어학 연구서’

용인의 문화유산 산책②-서파 류희의 ‘언문지’ 200주년의 해

 

 

현재 한국외대 글로벌캠퍼스 자리서 살며
1824년 6월 초순 집필… 한글 우수성 입증

 

용인신문 | 용인은 ‘언문지’의 고장이다. 올해는 재야 실학의 거두 서파 류희(1773~1837)가 조선 후기 국어학연구의 최고봉인 ‘언문지’를 저술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여 권의 백과사전적 거작 ‘문통’을 저술한 용인 출신 류희는 ‘언문지’로 인해 조선 최고의 음운학자이며 국어학자, 언어학자로 명명되고 있다.

 

언문지는 이전의 한자음 위주의 연구를 극복해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의 연구를 시도한 것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국어학 연구서로 평가되고 있다.

 

류희는 언문지를 1824년(갑신년) 중하(仲夏) 상순에 비 내리는 서파(西陂)에서 썼다고 기록했다. 중하는 음력 5월을 말하며 상순에 씌였으니 음력 5월 초다. 양력 6월 초순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류희가 언문지를 집필한 서파라는 지역은 모현읍 왕산리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관청마을로 불리던 산골 마을로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며 류희가 거의 평생을 거주했던 곳이다.

 

모현읍 매산리(마산마을)에서 출생한 류희는 아버지 류한규가 작고한 후 어머니인 이사주당(‘태교신기’ 저자)을 따라 세 누이와 함께 관청마을로 이사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조선에 대기근으로 극심한 흉년이 들던 10년간 충청도 단양지역으로 옮겨 농사를 지어 가족 생계를 책임진 바 있으나 그후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와서 말년에 오늘날 모현읍 일산리 남악(월촌마을)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서파 류희는 언문(한글) 연구서의 제목을 ‘언문지’라고 당당하게 명명했을 정도로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류희는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를 직접 사사해 당대 문자음운학에 일가견을 갖게 됐다. 당초 류희 나이 30세를 전후해 언문지를 저술했으나, 원고를 분실 해 20여 년이 지나 다시 쓴 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언문지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글을 저급하다고 하여 언문이라고 낮춰 불렀고, 평민이나 상민, 여자들이나 쓰는 천한 문자로 치부했다. 이러한 때에 류희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갈파했다.

 

류희는 당시 언문지를 저술하는 목적이 혼란스러운 한자음을 바로잡고자 함이었지만, 그보다는 한글 위주의 연구를 시도했다. 언문지는 서문, 초성례, 중성례, 종성례, 전자례 등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한글의 문자와 음운체계에 대해 독자적이고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고찰을 했다.

 

당시 조선에서 진행 중이던 구개음화가 관서지방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기록은 국어사의 관점에서 귀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인간이 발음할 수 있는 발음의 총 수를 1만 250개로 계산해 이를 모두 언문으로 표기할 수 있다고 전자례 부분에 명시했다. 이는 언문이 한자와 달라 말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우수한 글자임을 설파한 것이다. 오늘날 24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할 수 있는 글자 수가 11000여개로 알려져 있다. 처음 저술한 언문지에는 온전한 글자를 나열해 1만 250자를 가지고 종횡으로 행을 만들었으나 다시 쓴 언문지에는 글자를 종횡으로 나열해 원을 만드는 것이 너무 더디므로 삭제했다고 밝혔다.

 

류희는 문자의 기원에 대해 전자례 부분에 “언문은 비록 몽고에서 시작됐으나 우리나라에서 완성됐으며 실로 지극히 오묘한 것”이라며 “언문은 한자와 달리 정묘함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제자 원리가 간결해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둘째, 글자의 음이나 형태가 잘못될 우려가 없다”고 했다. 오보라 박사는 “류희는 한문과 훈민정음(언문)이라는 이중적 언어 구도 속에서 언문의 근본 원리 및 효용성을 강조하며 언문을 한문과 거의 대등한 지점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류희는 당시 몰락한 소론가문에서 태어나 노론이 장악한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채 평생 초야에 묻혀 살면서 거질의 문통을 세상에 남긴 조선의 대학자로 동아시아 실학사상가 99인에 선정된 인물이다. 경학, 문학, 천문학, 역학, 춘추학, 음운학, 수학, 의학, 기하학, 측량학, 동물학, 식물학, 음악, 예악 등 전통시대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문통은 자취가 묘연했다가 지난 2001년 진주류씨 후손가에 의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해지면서 류희는 학계의 주목을 끌며 일거에 조선의 대학자 정약용, 이익의 반열로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