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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슬로건 난무하는 지자체

 

용인신문 | 언제부턴가 지자체 명칭 앞에 영어 구호를 붙이는 것이 대유행이다. 우리 용인시는 ‘ 르네상스 용인’이다. 르네상스는 전 세계적인 고유명사이니 문화사대주의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인접한 수원시는 ‘사람이 반갑습니다. 휴먼시티 수원’이라는 슬로건을 사용중이다. 서울은 이명박 시장 시절 하이 서울(Hi Seoul)을 사용하며 영어 슬로건을 붙이는 시초가 됐다. 이것이 박원순 시장 시절엔 I⦁SEOUL⦁U로 바뀌었다가 오세훈 시장이 당선되자 Seoul, My Soul(서울, 나의 영혼)로 다시 바뀌었다.

 

지방 정권이 바뀌면 영어 슬로건도 바꾸는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일단 로고를 바꿔야 하고 입간판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얼마 전에 서편제의 무대가 되었던 완도군 청산도에 ‘슬로길’이 생겼다는 기사를 보고 내가 모르는 순수 우리말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슬로길’의 슬로가 Slow였다는 것을 알고는 할 말을 잊었다. 차라리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李淸俊)길’로 명명했다면 뜻깊었을 것이다. 대구광역시는 ‘다이내믹 대구!’(Dynamic Daegu!)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직 시절 외빈을 접견하면서 유아 베리 웰컴!(Your very Welcome)이라고 인사했던 적이 있는데 보수언론은 이 국적 불명의 영어를 두고 ‘실전 영어’라고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그랬다면 ‘상고 출신이라 그렇다’ 비난했을 터였다. 세계에서 표현력이 가장 우수한 한글을 발명한 나라에서 영어 슬로건을 앞다퉈 붙이는 것은 세종대왕께 송구스러운 일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은 우리말 말살 정책을 펴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로 시행했지만, 우리 민족은 우리말과 고유의 성씨를 지켜냈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대통령 시절 국무총리에 지명되었다가 국회 동의를 받지 못한 어떤 분의 어륀쥐!(오렌지) 소동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다.

 

일로삼김(一盧三金) 시절, 민주자유당에 박희태 씨라는 명대변인이 있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일컫는 ‘1로 3김’은 고 박희태 씨가 작명한 것이다. 그분은 사자성어를 인용한 격조 높은 ‘대변인 성명’으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도 박희태 씨가 저작권자다. 그때 민주당에는 고 박상천 씨가 대변인이었는데 두 분의 명대변인은 품격있는 성명으로 대한민국 정치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

 

얼마 전 용인신문 논설위원 한 분이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조금 늦게 갔는데 ‘영어로 Break-time(휴식 시간)이라고 써 붙인 것을 보았다‘며 개탄했다. 지금 거리의 간판은 온통 영어 일색이다. 어떤 유명 백화점은 영어도 흔하다 하여 ‘식품매장에 불어와 이탈리아어를 붙여 놓았다‘는 뉴스도 있었다. 우리말을 괄시하면 문화식민지가 되는 지름길이다. 완도군에 ’슬로길‘을 ’이청준 길‘로 개명하라는 청원이라도 해야겠다. 이참에 지자체부터 영어 슬로건을 추방할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