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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사직단·여제단’ 117년 만에 베일 벗었다

동국여지승람·경기읍지 등
옛 문헌에 기록으로만 존재
양지지구 발굴 위치 첫 확인

 

 

 

 

 

 

 

 

 

용인신문 | 양지 사직단과 여제단의 위치가 일제강점기 이후 117년만에 최초로 확인됐다. 처인구 양지리 산 100번지에 사직단이 있었고, 이곳으로부터 100여 미터 떨어진 인근 101번지에 여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동국여지승람’, ‘경기읍지’, ‘양지읍지’ 등 문헌에 존재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고 그 위치를 전혀 알 수 없던 2 단의 위치가 최초로 확인된 것. 이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임야조사부에 두 곳의 번지수가 기록된 데 따른 것이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인 1908년 조선통감부의 명령으로 제사에 관한 시설이 대부분 철폐돼 사직제가 폐지된 시점으로부터 117년만에 그 흔적을 처음 발견하게 됐다.

 

지난해 10월, 양지지구 2블럭 지역주택조합이 여제단이 소재한 101번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를 마친 상태며, 사직단은 현재 미발굴 상태로 남아있다. 여제단은 용인 양지지구 지구단위계획 사업 구역에 포함되는 부분으로 해발 278.2m의 태봉산에서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가지 능선의 중하단부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석재와 유물편 소량 및 다수 기와편이 관찰됐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미 후대에 분묘 여러 기가 조성되면서 여제단 원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 못한 것이 확인되어 아쉽게도 기록보존 후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양지면 양지리는 조선 시대 양지현이 있던 곳이다. 여느 고을의 읍치와 마찬가지로 객사와 동헌, 향교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객사와 동헌은 사라졌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한양에서 왕이 사직단에 제사를 지냈다면 지방에서는 각 고을의 수령이 사직단을 주관했다. 용인에는 용인현과 양지현에 사직단이 있었다.

 

여제단은 제사를 받지 못하는 무주고혼이나 역질을 퍼뜨리는 귀신인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의 각 군현에 여단을 두어 역병을 예방했으며 고을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김대순 용인시 학예연구사는 “조선은 한양에 도성을 만들 때 종묘와 사직단을 가장 먼저 건설하고 궁궐을 지었을 만큼 사직을 국가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다. 태종 때 전국에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함에 따라 성종 때까지 대부분 설치된 것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전국에 대략 330여개의 사직단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양지현의 사직단과 여제단은 현재 터만 남아있는 상태인데 양지읍지 등 기록에 신실 1칸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0년대 임야대장에는 사직단부지, 여제단부지로 표기되어 있어 그 사이에 건물은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지 사직단과 여제단 관련 기록은 1871년(고종8)에 간행된 ‘경기읍지’에 “여단, 신단이 1칸이고 사방이 붉은색이며, 사직단 우측 변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도 사직단과 여단이 존재한다.

 

또 1899년에 발행한 양지읍지에 따르면, 양지현의 경우 사직단과 여제단, 성황당 그리고 향교가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3개는 모두 사라지고 양지향교만 남아있는 상태다.

 

한편, 디지털용인문화대전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사묘조(祠廟條)에 “양지현 여단은 현 북쪽에 있다”고 기록돼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성황단만 나타날 뿐 여단에 관한 기록은 없다. 또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양지현 편에는 “여단이 현의 북쪽에 있다”고 되어 있고, 위치는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

 

이와 함께 1871년 이후에 간행된 ‘경기읍지’ 여제단조의 기록에 “신실(神室)이 1칸이고 단(壇)이 4칸이다. 신미년에 이건하였다”라고 했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899년에 만들어진 ‘양지읍지’에 “여제단은 관문 서쪽 2리에 있다”고 돼 있어 원래 현 북쪽 2리에 있던 것을 신미년에 서쪽으로 이건했음을 시사하고 있으나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다고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