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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사회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 한 ‘독도’

조선침략의 첫 희생자…해방 후 원상회복
일본, 시마네현 고시 등 분쟁지역화 전략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중학교 새 학습지도요령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명기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도 강경대응 할 방침을 밝혔고. 정치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민들의 목소리도 커져가고 있다.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은 독도를 가만 나두지 않고 있는 것일까. 1903년부터 1994년까지의 독도의 근대역사를 한번 되짚어 본다.

△ 조선침략의 첫 번째 희생자 독도
1903년 울릉도에는 일본인이 63호나 살고 있었고, 일본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도동에 주재소까지 설치했다.

1904년 8월에 일본정부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요해 한일협정서를 성립시켰으며, 이 협정서에 의해 정부의 주요 부서에 일본인 재정고문관과 외국인 외교고문관을 두어 식민지 정벌의 절차를 밟아 나갔다.

이 무렵 러일전쟁중인 일본해군은 러시아 해군을 정찰할 목적으로 1904년 8월에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했으며 1905년에는 독도에도 망루를 쌓았다.

일본 시마네 현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사업가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도에서 강치등 어로의 독점권을 얻기 위해 일본정부에 교섭을 해줄 것을 농상공부에 요청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일본해군성은 그로 하여금 “대한제국 정부에 빌려달라고 요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독도를 편입하고 빌려줄 것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에 나카이는 량고도(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하였으며, 이에 일본정부는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로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북위 37도9분 30초. 동경 1백31도 55분. 오끼도와의 거리가 서북쪽으로85리에 달하는 지점의 섬을 죽도(다케시마)라 부르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의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한다.’

그 뒤 1년 후인 1906년 3월 28일에 시마네 현 사무관을 통해 일본은 서면이 아닌 구두로 울릉군 군수 심흥택에게 알렸다. 이때 대한제국은 일본인 통감이 통치하는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심흥택 군수로부터 보고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조처”라고 반발했지만, 외교권이 박탈당한 상황 속에서는 그 어떠한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탈하기 5년 전 독도를 우선 강점했다는 이러한 사실은 독도가 조선침략의 첫 번째 희생자였음을 의미한다.

△ 해방과 함께
1945년 해방과 함께 독도는 1943년 12월1일 성립된 카이로선언의 내용에 따라 독도의 원상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46년 1월 29일 에 연합국 최고 사령관 인 맥아더는 독도에 대한 중요한 문서를 일본 정부에 보내게 된다. 이 각서의 내용에 울릉도 및 제주도와 함께 리앙쿠르열암(독도)을 명시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952년 4월에 발효된 패전국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강화조약(센프란시스코 조약)에서 SCAPIN677호에서 명시적으로 표기되었던 독도가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빠졌다는 이유를 들어 독도가 한국영토로부터 제외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1948년 8월 5일 남측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정부는 독도에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를 부여하는 행정조치를 취하였다.

1948년 6월 8일 미 B29폭격기들이 독도주변에 조업 중인 우리어선들을 오인하고 폭격을 했다. 이때 독도는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였다고 한다.

1953년 4월 한국전쟁으로 인해 독도해역에 대한 경비가 소홀할 때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1956년 12월에 경북경찰청 소속 독도경비대에 수비권을 넘길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50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사수하였다.

그 뒤 1965년 최종덕 옹께서 독도의 서도레 집을 지으며 살기 시작했던 것을 시작으로 1987년 조준기씨 일가와 송재욱씨가, 1991년에는 김성도씨가 부인 김신렬씨와 함께 주민등록증을 독도에 옮기며 살았다. 1989년에는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이 결성되어 독도가 국제 섬으로 인정받기위해 매년 독도에 나무를 심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