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에
▲ 노고봉 정상석
노고봉은 모현면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모현 사람들은 정광산 새다름산 앞바위산까지 노고봉이라고 한다. 모현에서 보면 모현을 감싸 안은 품이 넓은 산이다. 그런데 정광산이 커서 정광산 안에 노고봉이 있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큰 산릉의 제일 높은 주봉이 노고봉이다.
걸어가는 산 너울길
성인(정몽주)을 추모하는 모현면에 들어서면 마음가짐부터 조심스럽다. 동쪽에 넓게 버티고 있는 광주산맥의 한부분인 노고봉은 산세가 좋기로 유명하다.
모현에 오면 외대 앞에 있는 모현 지석묘를 보는 것도 너울길 걷기의 일 부분이다. 지석묘를 보고 동쪽의 용인외고로 통하는 넓은 길가에 노고봉 등산 안내 표지판이 있다. 노고봉 너울길의 들머리다.
능선길은 넓고 편하다. 언덕길로 올라서면 약수터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 이어 능선의 쉼터에 도착한다.
운동기구와 평상이 있어 쉬기 편하다. 이어 밧줄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긴 계단길은 노고봉이 높다는 힌트를 주는 듯 싶다. 이어 만나는 소나무 아래 의자는 노고봉에 어울리는 쉼터다.
너울길은 흙 길로 많은 시민의 걷는 길이라 깨끗하다. 이어 계단으로 오르면 평지길 옆 쉼터다. 노고봉의 쉼터는 대부분 소나무 밑에 만들어 느낌이 좋고 편하다. 옆에 또 계단이다.
▲ 정광산에서 본 초부리 |
노고봉에서 제일 좋은 전망대다. 전망대를 뒤로 하고 한너울 넘어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작은봉에 서면 남쪽의 산이 아름답게 보인다.
정광산은 맨 앞에, 뒤로 태화산 말아가리산이 잘 어울리는 그림 같다. 이어 넓은 노고봉 정상에 도착한다. 광주시에서 만든 이정표 옆으로 노고봉 정상석이 있다.
넓은 정상터에 돌탑 긴의자 식탁 평상까지 쉬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평시 탐방객이 많은 곳이다.
▲ 모현 지석묘 |
남쪽으로 태화산, 말아가리산, 마락산, 페러활공지, 휴양림 뒷산인 큰산 벌덕산까지 이어지는 산릉이 광주산맥이다.
서쪽의 경안천 방면으로 내려선다. 너울길은 좁다랬지만 소나무가 길을 안내한다. 작은 바위봉을 지나 내려서면 넓어 보이는 바위봉이 떡갈봉이다.
바위에서면 산아래 갈월이 잘 내려다 보인다. 이어 한참을 소나무길로 이어지나 삼거리 갈림길이다. 오른쪽길이 갈월 저수지길이다. 능선길은 남구만 선생 묘지로 연결되는 길이다.
갈월 계곡으로 들어서면 길이 넓고 간벌을 해서 걷기 편하다. 이어 멋진 갈월 계곡은 지나는 객을 모두 반긴다. 둥군 바위를 받치고 있는 효자바위를 보니 느낌이 온다.
▲ 남구만 사당 석물 |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약천 선생은 탕평책으로 사색 당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셨고, 문학은 물론 그 시대의 삶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거물로 우리 곁에 계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분이다.
45국도 고개에서 갈담 마을로 들어서면 비야수(경안천)으로 이어지는 마을길로 남구만 선생의 별저 및 사당이다. 남구만 선생의 삶을 느끼게 한다. 앞 개천 비야수 넘어 구만이산에 산노을을 보며 성현을 그리는 마음으로 너울길을 마친다.
용인팔경을 정할 때 쓰레기 밭인 경안천이 10여년 만에 수질이 좋아졌다. 앞으로 조금만 더 보호 관리하면 약천 선생의 비파 소리를 들을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는 용인의 환경 변화를 용인팔경을 통해 본다.
▲ 모현 지석묘 |
갈월
연산군 때 홍철이란 분이 연산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칡넝쿨로 의관을 차려입고 선정을 베풀어 달라고 기원을 했다하여 홍철골에서 갈곡으로 갈월 갈담에 갈자가 생겼다고 한다.
갈담은 갈월과 비야수의 파담을 합친 마을이다. 갈월 마을 경노당 앞은 회나무가 정자나무로 여름을 나는 멋진 쉼터다.
모현 지석묘
모현면 왕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로 규모는 용인에서 가장 큰 지석묘로 1호 고인돌은 굄돌과 막음돌이 있는 탁자식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570㎝, 너비 400㎝, 두께 90㎝이고 평면 생김새는 사다리꼴이다. 2호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판단되지만, 현재는 굄돌이 쓰러진 상태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20㎝, 너비 380㎝, 두께 85㎝이며, 평면 생김새는 삼각형이다.
남구만
1629(인조7)~ 1711(숙종 37). 조선 후기의 문신. 말년에 23년간 처인구 모현면 바파담에 기거 하셨다. 당시 서인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널리 알려져 있는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지은이다.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글 사진: 이제학 이메일ljh33511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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