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중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기자 나이는 고작 열 살 전후였으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촛불과 등잔불 밑에서 한글을 처음 배웠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입학 후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운학동 시골마을이었고, 중요한 것은 지금도 그 집터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산골마을까지 대형 덤프트럭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마을은 버스조차 구경할 수 없는 오지마을이었다. 그러다보니 큰 덤프트럭들의 출연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산 너머 양지면 쪽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수여선이 다니고 있었기에 이따금 기차 화통 삶아먹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반면 운학동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산골마을이었기에 대중교통수단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어느 날부터 대형 덤프트럭들이 마구 몰려와 마을 산 구석구석까지 뒤져 큰 돌을 실어 나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엔 나이가 너무 어려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당시 마을 어른들은 이 삼 십리 떨어진 곳에 용인자연농원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자연농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초등학교 5~6학년이 되어서다. 그동안은 소풍을 가도 동네 약수터나 무덤가로 가다가 때 아닌 자연농원 소풍이 잡혔던 것이다. 그때 난생 처음 말로만 듣던 코끼리를 두 눈으로 처음 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자연농원은 유년 시절의 신세계나 다름 없었던 공간이다.
요즘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해외로까지 가지만 당시만 해도 버스를 타고 간 첫 소풍이었기에 수학여행 기분이었다. 참고로 37년이 지난 지금이야 경전철이 기흥역에서 에버랜드 앞까지 운행되고 있으니 접근 환경을 예전과 비교한다면 천지개벽이나 다름 없다하겠다.
공교롭게도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의 자연농원 컨셉은 요즘말로 힐링 컨셉이다. 현재의 에버랜드 일부 지역을 돌아보면 그때 심었던 밤나무 동산 잔재들이 남아 있고, 포곡읍 신원리와 유운리 등 에버랜드 인근 지역에는 당시 자연농원에서 시작했던 축산농가의 명맥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젠 삼성 에버랜드는 글로벌 기업으로 국내 최고의 대기업 계열사로 굳건히 자리매김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증하듯 외형적으로는 에버랜드 누적 방문객 수가 37년간 무려 2억 명이 넘었다고 한다. 순수하게 관광객 숫자만 따져 비교해 본다면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4번씩은 다녀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듯 시민들은 과거의 추억과 외형적인 성숙에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3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용인시와 시민 잠재의식 속에는 반 비즈니스 프렌들리 의식이 강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에버랜드를 대기업 계열사라고 보기 보다는 용인 토종 향토기업으로 애정을 갖고 본다면 어떨까. 이를 위해서는 삼성 에버랜드 역시 용인시와 더욱 긴밀하게 협조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더 많은 환원 사업을 해야 한다. 이런 자세야 말로 글로벌 경쟁 시대에 살아남는 최고의 생존 전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