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6
병원(病院)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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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필시집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절친했던 후배의 회고에 의하면, 애초 시집의 표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닌 ‘병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작품에 관한 시인의 애정이 특별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아마도 그는 세계를 병원으로 사람들을 환자라고 보았던 모양입니다.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시인의 암중모색에 동참하게 되는 요즘이지요. 시를 살펴보면,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합니다. 여자의 처지와 대비되는 담담한 문장,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오래 참다 병원을 찾은 ‘나’의 절망.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병이 없다”는 진단은 폭력에 가깝네요. 시련과 피로가 깊어질 때, 다만 “성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이어집니다. 여자가 병실 안으로 사라지네요. 그리고는 “그가 누었던 자리에 누워”보는 ‘나’의 행위. 숭고하기까지 이 장면에는, 우리가 아직 잊지 않는 기원이 숨겨져 있고.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