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용인(龍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잘 모른다. 피부에 와 닿질 않기 때문이다. 현·근대사임에도 역사가들의 소유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치단체와 교육기관이 세심하고, 지속적인 참교육을 못한 탓이다. 역사 인식이야말로 공동체 삶의 자원이고, 큰 힘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교육 분야의 장식품 정도로 취급 당하고 있다. 역사 교육은 항시적이어야 한다.
용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용인출신으로 임옥여, 정주원, 이익삼 등의 의병장이 있고, 의병부대를 조직한 임오교, 이덕경, 김순일, 윤성필, 정용대, 윤관문 등이 있다. 최근 많이 알려진 여준, 김혁, 남정각, 정철수, 오의선, 이홍광 등은 해외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들이다. 아울러 이한응과 유근 등은 외교활동 및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유근은 남궁억과 함께 횡성신문을 창간했고,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는 등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최근 박숙현 작가가 쓴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의 마지막 증언』에서 집중 조명된 3대 독립운동가 가족사는 세계적으로도 돋보인다. 용인 원삼면 죽능리 출신의 오인수 의병장과 아들 오광선 장군, 그의 딸 오희영, 오희옥 등은 3대 독립운동가다. 생존에 있는 오희옥 지사의 ‘마지막 증언’이야말로 유일무이한 책으로 용인에서부터 널리 읽혀져야 한다는 게 역사가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중론이다.
원삼면 좌찬고개에는 ‘3·1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있다. 1919년 3월21일, 이곳에서 주민 1000여명이 모여 용인 최초로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외쳤다. 이로 인해 용인 전역에서 연 인원 1만 3200여명이 참여했다. 이중 35명이 사망, 139명이 실종되는 등 총 741명이 희생됐다.
반면, 일제 강점기에 용인에서 활동한 유명한 친일파도 있다. 구한말 양지현감으로 부임한 함경남도 출신 송병준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아들 송종헌도 송병준이 죽자 백작의 작위를 이어 양지면장을 지냈다. 이렇듯 역사는 동전의 양면처럼 흑역사도 공존하는 법이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라며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에 대응이라도 하도 일본은 경제보복으로 온 국민을 분노케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를 파기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국민들 또한 제2독립운동이라며 일본 불매운동 중이다. 수백 년에 걸친 한일 역사 문제는 결코 끝이 없어 보인다.
용인시가 이제라도 후세들에게 용인과 관련된 독립운동사를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교육과 홍보로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시켜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