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상자의 이설
전다형
어떤 사과를 담았던 것일까
골목에는 각들이 없다
홀가분하게 속을 비워낸 상자가 각에 대해 각설
어제를 치고 오늘을 박다 뽑은 못
구멍 숭숭한 사과상자 눈에 밟혔는데
사과가 사회로 읽혔다
반쯤 아귀가 비틀린 자세로 골목을 물고 늘어졌다
상자가 불량한 자세로 한껏 감정을 부풀렸다
생채기에서 흐른 사과 진물이 그 진통을 기록해 놓았다
아프면서 큰다는 말, 싸우면서 정든다는 이설
옹이에 옷을 걸고 햇살 쪽으로 기운 나이테를 읽자
빈 사과상자 부등켜안고 끙끙거린 내 안의 사과가 쏟아졌다
사과밭 모퉁이를 갉아먹던 사과벌레가 내 늑골 아래 우글,
다 파먹을 요량이다
사과가 알량한 고집을 잡고 늘어졌다
사과를 비운 상자는 성자다
꺾인 전방 마주 선 내 볼록 눈거울이 맵다
전다형은 2002년《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등단 후 10 년 만에 첫시집『수선집 근처』를 내고 그 후 8 년 후에 이번 시집 『사과상자의 이설』을 냈으니 과작의 시인이다. 그녀는 활달한 언어의 운용과 예리한 이미지로 자신의 내면의 풍경을 노래한다.
「사과상자 이설」은 골목에 버려진 사과상자에 대한 사유와 인식의 시편이다. 눈에 띄는 키워드는 각설과 이설이다. 사과상자가 비워진 후에도 사과상자임을 주장한다면 이건 각설이다. 영원한 내 안의 변하지 않는 나인 것이다. 비워진 사과상자가 불량한 자세로 한껏 감정을 부풀렸다면 내 안의 반란이다. 나를 뛰어넘는 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안이 놓인 문장은 ‘옹이에 옷을 걸고 햇살 쪽으로 기운 나이테를 읽자/빈 사과상자 부등켜안고 끙끙거린 내 안의 사과가 쏟아졌다’이다. 나이 들어 사물의 본질을 탐색해 갈 때 그녀 안의 사과가 쏟아진 사건은 자책이며 회한이다. 그녀는 골목에 버려진 빈 사과상자를 통해 자신의 내면의 풍경을 아프게 보고 있는 것이다. ‘사과를 비운 상자는 성자다’는 울림 깊은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녀는 성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상상인>간 『사과상자의 이설』 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