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주변이 주변인 것은 상황이 변했는데도 자기를 억압하는 기존의 위계를 스스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갸 아니란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사라져가고, 유동적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외부의 시선보다 내부에서의 생각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용인은 이제 서울의 주변도시가 아니다. 용인시 최대의 면적을 점유하는 처인구도 주변구가 아니다. 선거철 마다 ‘일류 수지’라고 찬사를 보내(?)는 낙하산 후보들의 낯뜨거운 구호에 전국구 스타를 만들어 줬던 수지구도 용인의 외곽이 아니다.
1973년 10만에 불과했던 용인은 2002년 50만의 중소도시로 성장했다. 팀 마샬의 주장대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생거용인’의 마음으로 들어 와 살기 시작한 용인의 가치는 현재형이자 미래형이다. 그러므로 2017년 백만을 돌파한 대도시로 성장한 용인을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는 이분법 자체가 시대 착오이다. 사람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적 요소는 오랜 세월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니 지금, 용인시야말로 발상의 전환, 그것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해볼 수 있는 막바지 기회다.
1789년 혁명이후 파리의 인구는 급증했다. 1850년, 백만 명을 넘긴 파리는 계획없이 지어진 건물과 구불거리는 도로와 오염된 골목으로 전염병이 창궐하기 일쑤였다. 1832년에 발생한 콜레라로 1만 5000여 명이 사망했다.
공화정을 뒤엎고 스스로 황제로 취임한 나폴레옹 3세의 능력은 거의 최악이었다. 그나마 후한 평가를 받는 것은 파리의 개조 프로젝트였다. 물론 이것도 정치적 의도가 있었지만, 오스만에 의해 추진된 파리의 환경 개선은 신의 한수였다.
오스만은 파리를 관통하는 도로들을 연결했다. 구도심과 외곽지역을 순환시키고,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를 완성시켜 하나의 파리, 공동체의 도시 개념을 만들었다. 또한 충분한 녹지를 조성하고 광장을 건설하여 시민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주변에는 공공 건물을 건립하여, 시민 누구라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며, 재생을 꾸준하게 이어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묶어 미래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시민의 의견을 모으는 장치는 덤으로 따라왔다.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고정희의 ‘사랑법 첫째’라는 시처럼, 여전히 나는 용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라는 김우창의 주장은 사람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 사이에 존재하는 것. 그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대공황 당시에 미국은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 남아도는 쌀을 버렸다고 한다. 자본주의 욕망이 가져온 끔찍한 행동이었다. ‘사람중심’의 용인시도 분명하게 새겨야 한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 시정(市政)은 일모도원(日暮途遠)만이 능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