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유병록 양말에 난 구멍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 유병록은 198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슬픔은」은 2행으로 된 단시다. 이 시처럼 단시에서는 시 제목도 한 행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슬픔은 양말에 난 구멍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라고 읽히는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슬픔이라면 어떤 슬픔일까? 부모 때문에 오는 슬픔이라면 들켜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 슬픔은 아마도 사랑의 상실 혹은 이별의 슬픔일지 모른다. 창비 간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중에서. 김윤배/시인
여름 해는 얼마나 긴가 송진권 여름 해는 뜨겁고 길다지만 우리 소 배 속보다는 헐씬 작아 쇠풀 뜯기러 갈 때마다 엄마는 해가 저만치 달아산 넘어가면 집에 오랬는데 해는 져서 어두워졌는데도 우리 소는 아직 풀을 뜯어 송진권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200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자라는 돌』 『거기 그런 사람 살았다고』가 있다. 「여름 해는 얼마나 긴가」는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유년의 정취다. 소는 농가의 커다란 노동력이며 자산이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했기에 대학졸업장이 우골탑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긴긴 여름날 소 풀을 뜯기는 소년의 모습이 선명하다. 창비 간『원근법을 배우는 시간』 중에서. 김윤배/시인
문신 정호승 새벽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홀연히 일어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날카롭게 바늘을 찔러 이마에 새 한 마리를 문신했다 문신을 끝내자마자 새는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다 바늘을 입에 물고 나를 데리고 초승달이 뜬 새벽하늘로 정호승은 1959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신」은 사모곡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노래인 것이다. 새벽꿈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바늘을 찔러 이마에 새 한 마리를 문신했다. 문신을 끝내자마자 새는 바늘을 입에 물고 화자를 데리고 초승달이 뜬 새벽하늘로 날아갔다. 창비 간『슬픔이 택배로 왔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망종 안희연 며칠 만에 돌아온 그는 어딘가 변해 있었다 눈동자에는 밤의 기운이 가득했다 대제 어딜 다녀온 거예요? 한참 동안 말없이 서서 한참 동안 볕을 쬐더니 앞으로는 돌을 만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그는 돌을 주워 오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돌과 보냈다 마당에는 발 디딜 큼 없이 돌이 쌓여갔고 그는 자주 돌처럼 보인다 나는 그가 돌이 되어버릴까봐 겁난다 눈부시게 푸른 계절이었다 식물들은 맹렬히 자라났다 누런 잎을 절반이 넘게 매달고도 포기를 몰랐다 .....하략...... 안희연은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이 있다. 「망종」은 24절기 중의 하나로 소만과 하지 사이에 들며 이맘때가 되면 보리는 익어 먹게 된다. 며칠만데 돌아온 그는 변해 있었다. 눈동자에 밤의 기운이 가득할 정도로 밤일을 했던 것이다. 어딜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앞으로 돌을 만지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돌을 주워오기 시작한 그는 하루 종일 돌과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돌이 가득했다. 눈부신 계절이어서 식물들
고백 이태수 미사 때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고 기도하면서도 지키기 어렵다 어렵다기보다 못 지키는 경우가 있다 내게 잘 못한 이보다 내가 되레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잘 못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용서하지 못한 얼굴이 떠오르면 마음의 상처가 도지기 일쑤다 이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이태수는 194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그는 주변에 산재해 있는 대상들을 의식의 자력으로 끌어들여 삶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사유하고 통각하면서 시의 깊은 맛을 돋우어낸다. 「고백」은 카톨릭 신자로서 타인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의 괴로움을 노래한 시다. 나는 그를 용서했다하다가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 마음이 다시 어두워진다면 용서 한 것이 아닌 것을 화자는 수없이 경험한 것이다. 이제는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하지만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문학세계사 간 『나를 찾아가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혓바늘 김기택 말할 때마다 따끔따끔하다 밥알이 구를 때마다 혀가 찔린다 물렁물렁하고 뭉툭한 혓바닥에 찔린다 아이스크림을 핥던 촉촉한 탄력에 찔린다 혀끝이 이빨 사이를 뒤지고 입안을 더듬고 혀가 만들어낸 말들을 다 뒤져도 바늘은 찾을 수 없고 말랑말랑한 것밖에는 없어서 찌르는 것이 없는데도 찔린다 찔리기도 전에 찔린다 찔리는지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이 소스라친다 김기택은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기택은 주로 사물시를 써 왔기 때문에 사물주의자로 불린다. 「혓바늘」은 그의 사물시 중의 하나다. 혀에 돋은 돌기로 음식이 닿으면 통증이 오는 병증이다. 말할 때마다 따끔거리고 밥알이 닿을 때마다 따끔거린다. 혓바늘에서 바늘을 유추해낸 것이 이 시의 비의다. 혀끝이 이빨 사이를 다 뒤져도 바늘은 없고 혀가 만들어낸 말을 다 뒤져도 바늘은 없다. 그리하여 지르는 것이 없는데도 찔리는 게 혓바늘이다. 문지 간 『낫이라는 칼』 중에서. 김윤배/시인
관광 김리윤 ....전략.... 그러나 불빛. 저 멀리 보이는 불빛 하나. 흔들리고 점멸하는 아주 작은 빛. 한 걸음 한 걸음뗄 때마다 조금씩 커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그런 빛. 도착할 빛. 아직 도착하지 않은 빛 앞에 서 있다는 믿음은 불가능했다. 틀렸다. 제가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일까요? 제 믿음의 흐릿함이 문제일까요? 제 마음의 약함이 문제일까요? 또 저 멀리 보이는 빛을 상상하고 말았습니다. 투명한 손을 잡고 투명한 발의 무게를 느껴보려 애쓰며 우리는 계속 걸었다. .....후략.... 김리윤은 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리윤의 시가 닿고자 하는 것은 빛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너머, 그 의지를 가진 빛에 있다. 「관광」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빛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가득한 시다. 그러나 그 빛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크지 않다. 그러면서도 빛을 향해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빛이 올 것이고 빛을 만날 것이고 빛은 환하게 비춰주어서 약해지던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빛은 상상만으로 이미 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왜 손과 발이 투명하겠는가. 문지 간 『투명도 혼합 공간』 중에서. 김윤배/시인
봄여름가을겨울 진은영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 젖은 냅킨처럼. 만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진은영은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연시다. 화자는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고 고백한다. 그것도 전적으로 열린 채 간 것이다. 여름비는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시도 때도 없이 내렸다. 그다음의 행이 자못 심상치 않다. ‘나는 네 밑에 있다’고 비밀스런 고백이 뒤따르는 것이다. 커피로 젖은 냅킨처럼 혼곤하게 네 밑에 있는 것이다. 가을은 만개의 파란 전구가 켜진 듯 오고 영혼은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맨발로 맨홀 뚜껑에 쌓인 눈을 밟으며. 문지 간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중에서. 김윤배/시인
Psalms 유혜빈 나 걷는 걸음이 마르지 않는 것은 내가 당신의 수없이 많은 빛깔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예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그 눈물 모아 당신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세요 유혜빈은 2020년 창비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Psalms」이라는 시제는 성서쯤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시에서 당신이라고 호명한 것은 절대자를 호칭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럴 때 나는 당신의 수없이 많은 빛깔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의 눈물을 모아 당신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시라고 신탁할 수 있는 것이다.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중에서. 김윤배/시인
시체공작소 이용훈 한 시절 이름을 가진 자들이 머물렀던 곳 찌든 추방의 냄새가 풍겨 비명은 공허해 허공에 맴돌 뿐 음습한 소독내 낡은 철재 침대 흰 벽으로 그자를 묶었지 손 좀 내밀어주오 불러도 누운자는 신원 미상 일어나질 않아 길 위의 생활자는 짙은 그림자 속 내계의 삶이라 이용훈은 2018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도서관과 관련된 분야의 일을 했다. 「시체공작소」는 시체를 보관하는 냉동실의 풍경을 노래한 시다. 냉동보관실은 시취와 음습함이 차 있는 곳이다. 소독액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은 철제 침대와 흰 벽이 전부다. 왜 시체의 손발을 묶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아마도 입관을 했을 수도 있음) 죽은 자는 손을 내밀어 달라고 하는 유족의 울음을 듣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짙은 죽음의 그림자 속의 내 세계를 지니고 산다. 창비 간 『근무일지』 중에서. 김윤배/시인
새벽강 신동호 눈이었던 날이 지나갔다 삼일 밤낮이 걸려 겨우,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서쪽바람이 동쪽 기억을 밀어냈다 강물의 정수리 위로 달빛이 내려와 앉았다 밤낮이 뒤섞이던 세한이었다 신동호는 1965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용악문학상을 수상했다. 「새벽강」은 세한의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눈 내리는 날들이 지나가고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사흘이나 지나서였다. 소식은 아마도 부음이었을 것이다. 강물 위로 달빛이 내려와 앉은 풍경은 차고 시렸다. 밤낮이 뒤섞인 것은 세한 때문이었다.『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중에서. 김윤배/시인
[용인신문] 마트료시카 이설야 나는 몇 개의 거울을 들고서 달렸다 똑같은 것들이 슬퍼보였다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다. 이설야는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고산문학대상, 박영은 작품상을 받았다. 「마트료시카」는 러시아의 나무로 깎은 인형인데 인형 속에 인형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 여행객은 이 목각인형을 하나씩은 사가지고 귀국 한다. 이설야의 서정적 자아가 마트로시카에 투영된 시로 분열된 자아가 있음을 고백 한다. 똑 같아서 슬퍼 보이는 인형은 곧 그녀 자신이다. 죽은 자들을 모두 기억 한다. 기억의 깊은 곳에 있는 죽은 자는 오래 전에 죽은 자이다. 창비 간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