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마부 번지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뼛속까지 저쪽주의자다. 그런 그가 선생님 저는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이 갖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가르침을 청한다. 이일 후 공자 일행은 주나라 사당을 들르게 된다. 孔子께서 주나라 사당을 둘러보다가 묘한 그릇(敧器)을 보시고 묻자 사당지기 왈, 이 그릇을 일러 다들 우좌(右坐)라 합니다. 공자 왈, 듣기로는 기기우좌는 가득차면 기울어지고 적당히 차야만 바르게 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사당지기는 그렇다고 대답하자 공자는 자로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여 시험을 해보니 과연 사당지기의 말대로 가득차면 엎어져 물이 모두 쏟아지고 적당히 차면 바르게 서며 비우면 기울어졌다. 이를 지켜본 공자는 감탄 하며 말한다. 번지가 언젠가 내게 묻기를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이 갖고 싶다고 했다. 잘 보거라. 가득 찼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기기(敧器)처럼 가득 차는 것이 싫어서 기울어지는 것도 있느니라. 그러자 자로가 가득 찬 것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묻는다. 공자는 우좌기기처럼 덜어내면 된다. 하니 자로가 또 묻는다. 덜어내려면 어찌해야합니까. 공자는 덜어냄에 대한 오사(五思)를 말한다
일찍이 항우는 일곱 겹의 갑옷을 껴입고 삼백 근의 철퇴를 휘두르며 전쟁에 임 할 때는 언제나 장외투쟁 전술을 쓴다. 그 배후에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란 뜻을 가진 아보라 불리는 명 참모 범증(기원전 278-204)이 있었다. 범증이 있는 한 항우는 모든 면에서 유방보다 몇수 위다. 항우가 40만 병사로 천하를 호령할 때 유방은 고작 10만 병사였다. 이때 범증은 유방을 쳐야한다고 하지만 거절됐다. 또 한 번은 100명의 기병만 이끌고 홍문연에서 유방을 제거하자고 했지만 항우는 우물쭈물 하다가 기회를 놓친다. 범증은 항우의 종제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죽이라 명하지만 항백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에 유방은 삼십육계 줄행랑으로 목숨을 건진다. 범증은 유방이 준 옥두(玉斗)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면서 통탄한다. 아. 어린놈과는 큰일을 도모할 수가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이다. 우리는 패공의 포로가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반간계(反間計)로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고 항우를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뜨린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는 인물 항우는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 할 것인가?란 절명
공자나이 62세가 되던 기원전 491년. 계씨의 박해를 피해 모국을 떠나 위(衛), 조(曹), 송(宋)나라를 떠 돈지 5년째 되는 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마침내 회수(淮水) 유역의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국경에 이른다. 진나라는 한비자가 동문수학한 친구 이사의 모함에 빠져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안회, 자로, 자공을 비롯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자신의 출신 성분도 잊고 스승과 함께 세상에 속했으나 세상에 물들지 않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기쁨의 사제공동체(師弟共同體)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적인 학장(學匠)인 공자는 일생일대의 가장 곤핍하고 핍절하며 서러운 순간을 맞는다. 진채지액(陳蔡之厄)이 그것이다. 진나라는 오나라와 초나라간의 전쟁에 휩싸인 상태라 통용되는 상식이나 예의 법도가 무너진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위엄을 갖기란 여간 힘든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공자일행은 오나라 패잔병을 만나 마차와 옷이며 식량조차 깡그리 빼앗긴다. 이로 인해 9일 낮밤을 굶어 분노한 자로가 따지듯 묻는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子路慍見曰「君子亦有窮乎?). 공자는 말한다. 군자란 원래가 궁한 법이지(子曰. 君子固窮) 그리고 이어서 자로
도오(道吾)가 묻는다. 앎이 많은 자와 앎이없는 자 중에 누가 더 훌륭합니까? 공자는 답한다. 앎이 없는 자는 죽은 사람에 속한다. 비록 죽지 않았다 해도 남에게 누(累)가 되는 일을 심히 많이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많이 아는 것은 좋은 것이며 그런 자는 마음 씀씀이도 넓다. 앎이 많은 자가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 나서면 훌륭하지만. 남을 해롭게 하는 일에 나선다면 훌륭하지 않다. 월석보는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어진 줄 알고, 우둔한 자일수록 스스로는 많은 것을 아는 줄 안다. 유향(劉向)의 설원하(說苑下)에 나오는 말이다. 지난 6월 27일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세칭 전두환 추징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시간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만 통용되는 법을 시간을 너머서 적용시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어서는 모순과 충족 이유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성적 인식은 기본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성의 근본 원리를 전제한다. 그것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받은 6억원을 아직 환원시키지 않는 모순율(矛盾律)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쳐야만 하는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이다. 그동안 역대 정부가 미납 추징 노력을 안
중국 15억 인구 중 전고(古文)의 대가를 꼽으라면 곽말약을 비껴갈 수 없다. 그가 일찍이 재미있는 잡서 한 권을 강호에 내 놓았는데 풀어쓴다면 맹자 이혼에 관한 보고서의 전말 쯤 된다. 아성(亞聖) 맹자는 아내와 이혼을 하는데 이혼 사유가 아내의 외모가 경국지색이라는 기막힌 이유에서다. 아내의 외모가 너무 미색인지라 남편인 맹자는 학문에 정진하는데 지장이 있다하여 아내를 내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맹자는 미색의 아내까지 내쳐가면서 학문에 정진한 결과 당대는 물론 후대와 만고에 이르러 공자와 더불어 인류 스승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선다. 그 맹자가 제자에게 말한다. 너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좋은 의견을 잘 들어주는 것이다. 헛 똑똑이(賢者)는 보이는 것만 믿고, 뭐 좀 배워 안다는 자(識者)는 믿는 것만 보고, 어리석은 자(愚人)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만들어보고, 일반인(凡人)은 남들이 본 것만 떼로 몰려다니며 찾아가서 믿는다. 이는 모두가 근본을 잃은 탓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맹자 이루하장 상에서 말한다.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天下之本在國),나라의 근본은 가정에 있고(國之本在家),가정(家庭)의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공자께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자 공자 왈,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녀는 자녀다워야 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무엇이 임금다움이며, 무엇이 신하다움인가를 말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 선비노애(蘆厓)유도원(柳道源1721~1791:조선후기)는「다움」에 대한 실천 사항을 경계의 글인 잠(箴)으로 해석을 한다. 하지 말아야 할 네 개의 사막잠(四莫箴)과 마땅히 해야 하는 사당잠(四當箴)이 그것이다. 動必招尤 莫如勿動(동필초우 막여물동) - 행하면 허물되니 행하지 않는 게 낫고. 言必致吝 莫如勿言(언필치린 막여물언) - 말하면 후회되니 말하지 않는 게 낫고. 做必無成 莫如勿做(주필무성 막여물주) - 하면 되는 게 없으니 안 하는 게 낫고. 求則自屈 莫如勿求(구즉자굴 막여물구) - 구하면 비굴해지니 안 구하는 게 낫다. 當動而動 動亦無尤(당동이동 동역무우)- 행 할 때 행하면 허물이 없고. 當言而言 言亦無吝(당언이언 언역무린)- 말 할 때 말하면 후회가 없고. 當做而做 做亦有成(당주이주 주역유성)- 일 할 때 일 하면 이루어지고. 求有
어린 시절 고아가 된 소년이 있었다. 삶에 부쳐 목숨을 끊으려하자 고부 왈, 남자의 인생에는 이불솜을 적시며 들을 만한 눈물겨운 인생사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훗날 독일의 문호 괴테에 의해 재해석되어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로 유명해진다. 고부는 말한다. 남자는 자신의 키만큼 책을 쓰고 죽어야 한다. 고아가 된 소년은 축목(祝穆)이고 고부(姑夫)는 남송의 거유 주자(朱子)이다. 축목은 고부 주희에게 학문을 배워 일생에 자신의 키만큼 책을 썼는데 236권의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거질인『사문류취(事文類聚)』와 방기로 두 권의 책을 더 찬(纂)했는데『방여승람(方輿勝覽)』과 『당서(唐書)』문예전(文藝傳)에 마철저이성침(磨鐵杵而成針)이 있다. 당(唐)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李白)은 젊은 시절 도교(道敎)에 심취해 파락아(擺落兒)로 산다. 이백은 불량배(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려 사천성(泗川省) 각지의 산을 떠돌던 중 상의산(象宜山)에서 공부 한다. 불량배들과 놀던 가락이 있다 보니 공부에 습(習)이 안 되어 10년을 못 채우고 하산 한다. 하산도중 계곡 바위에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쇠공을 갈고 있는 노파를 만난다.
계찰괘검(季札掛劍) 춘추시대(春秋時代)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 계찰(季札)이 왕재(王才)다. 수몽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하나 왕위 계승은 장자위존(長子位尊)을 들어 사양한다. 왕은 맏아들인 제번(諸樊)에게 위를 물려주면서 계찰이 왕재니 차례로 왕위를 전해 계찰이 왕위를 잇도록 하라. 유언한다. 큰아들 저번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스스로 선봉에서 죽음을 자초한다.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죽자 왕위계승은 넷째인 계찰 차례가 됐으나 정작 본인은 왕위를 사양하자 셋째인 여말의 아들 주우(州于)가 계승하니 수몽의 장 손자이자 저번의 아들 광은 숙부인 계찰 공이 왕위를 사양하면 장손인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며 초나라에서 망명 온 오자서의 도움으로 왕을 살해하고 임금이 되었으니 그가 오왕 합려다. 그 후 계찰은 연릉에 봉해져 연릉계자(延陵季子)가 된다. 기원전 544년 오왕 4년 오왕의 명으로 중원 각국으로 사신이 되어 북행(北行)길에 작은 서(徐)나라에 이른다. 계찰 일행을 환대하던 서 나라 왕은 계찰의 보검을 갖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계찰은 그가 자신의 보검을 원함을 알고는 중원(中原)각 나라의 사신 일
구(舊) 소련 군사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오백룡吳白龍,1913년~1984은 뒤돌아가 라는 말에 절대 복종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사학교에서 쫒겨나게 될 무렵 상관이 묻는다. 왜 뒤돌아가를 안 하느냐. 오백룡은 답한다. 패장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고, 참 군인에겐 뒤돌아가는 법이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옆에 있던 장군이 묻는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백룡은 관자춘추(管子春秋) 소문(小門)편에 기록된 말을 한다. 관자는 말하길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려면 기습을 해야 한다.(管子 曰 野戰必勝若何이며 管子對曰 以奇.) 이 대화를 마음에 담아두었던 김일성은 훗날 오백룡과 손을 잡고 오백룡 말대로 남한으로 기습해서 쳐들어온다. 이른바 6.25 전쟁이 그것이다. 그 후 남과 북은 38선이라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한 민족 두국가가 되어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분단국가로 서로의 아픈 곳만 콕콕 찔러 대며 으르렁대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까지 보유한 상태다. 오기 장군이 쓴 오자병서엔 이렇게 기록한다. 전쟁의 중요한 것은 먼저 적장을 알아야한다(凡戰之要 必先占其將). 이글에 대하여 모택동은 대장정 때 팔로군 사령관 주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장사 한번 떠나면 다시 오지 못 하리(風蕭蕭兮 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칠언(七言) 대구(對句) 열네 자로 된 이 시는 시황제를 암살하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객 형가(荊軻)의 절명 시 일수(一首)다. 동서고금을 통 털어 비장미 넘치는 시의 백미(白眉)라 한다. 사마천은 그의 명저『사기』「자객열전」에서 형가를 가장 비중 있게 다룬다. 그는 승리의 대풍가(大風歌)가 아닌 비극의 해하가(垓下歌)를 부르며 처절한 최후를 맞는다. 작금(昨今)을 무론하고 생존 인물 중에 승리의 대풍가와 비극의 해하가를 모두 부른 인물을 꼽으라면 이는 필시 박제된 악마 일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일(唯一)이다. 일해가 12.12 사태를 일으키면서 가슴에 좌우서로 담아두었던 명문(名文)이 있는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형가의 절명 시 일수라 한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이 사내는 분명 사나이 중 사나이다. 그런 사내가 역사에 오점을 남겼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을 피로 물들인다. 1980년 5월 18일 전라도 땅 광주에서 벌어진 강철 군화들로 짜여 진 작전명「화려한 휴가」가 그것이다. 역사는 이를 5.18광주 민주화 항쟁이라 한다. 그날
백성에게 있어서 밥은 하늘이다(食爲民天). 이 밥을 하는 솥을 일러 정(鼎)이라 한다. 정은『주역』 64괘 중 50번째 괘 명인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정(鼎)을「발이 세 개이고 귀가 두 개로서 오미(五味)를 조화시키는 보기(寶器)라 한다. 쉽게 말해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큰 솥이란 얘기다. 후모무정(后母戊鼎)이 그것이다. 임금의 어머니 무(戊)를 기려 만든 큰 솥을 말함인데 임금이 제사를 지낸 후 짐승을 삶아 일부는 신하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백성과 함께 나눠먹는다. 신하들은 임금이 나눠준 고기를 자기 집에 가져가 처자식과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마을 선비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선비가 그 고기를 먹고 건강히 자랄 수 있도록 길러낸다. 이를 양현(養賢)이라한다. 이렇게 길러낸 선비가 나라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할 때 이를 상현(尙賢)이라 한다. 상현의 직무는 국가를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이 전부다. 그러므로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제 배만 불러서는 안 된다. 본래 밥이란 결코 혼자 먹는 것이 아니다. 누구와 밥을 함께 먹어야 제 맛일까. 남성위본의 사회에서 여자가 대통령이 된 것은 혁명이다.「잡괘전(雜卦傳)」에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12월 19일은 파평 후인(后人) 윤봉길 어른의 80주기일이다. 윤 의사는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강독했으며 특히 자로의 포호빙하에 대장부의 기개를 느꼈다한다. 포호빙하는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문장인데 포호빙하지용(暴虎馮河之勇)이라고도 한다. 공자는 제자에게 말한다. 군자(君子)란 마음으로는 집착이 없으며 자기를 알아주는 주군에게 등용되면 충(忠)으로 목숨을 다하고 등용되지 못하면 초야(草野)에 숨어 살뿐이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안회(顔回) 뿐이다. 이를 듣고 있던 자로(子路)는 자신을 제쳐두고 후배인 안회를 인정하는 스승의 말에 크게 서운했다. 이에 공격형 질문을 한다. 만약에 선생님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자로를 제자로 삼은 뒤부터는 저자거리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스승인 공자의 답변은 달랐다. 공자 왈 나는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고 맨발로 황하(黃河)를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와는 함께 일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운 생각을 가지며 기쁨으로 도모하며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