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花 김남조 여긴 외로운 인습의 사막인데 그나마 별빛을 피해 나무그늘에 울던 애상의 마을인데 불 켜지듯 환히 눈도 부셔라 눈이여 신의 지문이나 찍혔을까 도무지 무구한 백자의 살결에 수정의 차가움만이 상기도 겹겹이 적시며 있으려니 이러한 날에 솔바람 이우는 산곡 얼어붙은 옹달샘을 찾아가면 거기서 잃어버린 이의 얼굴이 비쳐나 있을까 서성대며 머뭇거리는 고독한 영혼 (.....) 아아 눈뿌리 타는 더운 눈물을 뿌리면 설화는 거두어 하늘에 다시 피리라 김남조 시인은 192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 95세다.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설화」는 눈 온 아침의 풍경을 노래한 연시다. 인습의 사막에 내린 흰 눈, 애상의 마을에 내린 흰 눈은 눈부시다. 저 희고 순결한 눈 위에 신의 지문이 찍혔을지, 수정의 차가움이 겹겹이 백자 같은 살결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산곡 얼어붙은 옹달샘을 찾아가면 거기에 잃어버린 이의 얼굴을 만날지 몰라 서성이는 화자는 고독한 영혼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너는 나의 혁명 고원 그늘은 태양이 갈망에 겨운 세월 위에 던지는 씨니씨즘이었다 그늘 속에는 이름만의 공화국처럼 서운한 얼굴들이 그날그날 휴식을 취하는 풍속이 있었다 도피와 굴욕의 창백한 그늘에 엎뎌 처참한 숨소리가 어느 식민지 유행가를 닮아갔고 이따금 비라도 내릴 때면 서글픈 자기기만을 위안 삼았다 비굴한 고독이여. 그러나 태양은 그늘이 끝내 갈망의 머리를 드는 표적이었다. 뜨거운 가슴 파아랗게 트인 나의 사랑 자유의 해변에서 너는 내 보람을 영도하는 것이었다 -너는 나의 혁명이었다 고원 (高源, 1925 ~ 2008)은 재미동포 시인이다. 본명은 고성원(高成源)이며,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587번지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과정을 마쳤다. 1970년에 한국 현대시를 영어로 번역하여《Contemporary Korean Poetry》라는 책으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너는 나의 혁명」은 식민지인 조국에 바치는 헌시다.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주위와 그늘에서의 삶을 드러낸 이 시편은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며 끝내 너는 나의 혁명이라고
봄산 문태준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 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은 못 견뎌라 봄은 못 견뎌라 문태준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봄산」은 봄의 정취가 물씬한 시편이다. 시인에게 봄산은 쩔렁쩔렁,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산이다. 그런 봄산에는 진달래와 새알과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산다.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봄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창비 간 『이침은 생각 한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날개뼈 조온윤 네가 길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네 몸보다 작은 것들을 돌볼 때 가만히 솟아오르는 비밀이 있지 태어나 한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 위처럼 녹은 밀랍을 뚝뚝 흘리며 부러진 발로 걸어가는 그곳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처럼 조온윤은 199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되며 작품 활동 시작했다. 문학동인 《공통점》으로 활동 중이다. 「날개뼈」는 쉽게 읽히는 시는 아니다. 그만큼 중의적이라는 의미다. 화자는 지금 길에 버려진 죽은 새의 날개뼈를 보고 있다. 날개뼈는 새의 몸이어서 새보다 작은 것들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새에게는 비밀이 있는 것이다. 비밀은 한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처럼 위태로운 곳이기도 하고 밀랍을 흘리며 부러진 발고 걸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 비밀스런 장소는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창비 간 『햇빛 쬐기』 중에서. 김윤배/시인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최백규 지난 일이다 옥상 한가운데 서 있으면 멀리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늙은 내가 앉아 있을 서울행 열차를 향해 어린 내가 대구 육교 위에서 친구들과 돌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이만한 크기였을 것이다 머리 위 비행기 항로를 틀었다 봄은 멀고 하늘도 높아 눈발이 날릴까 최배규는 1992년 대구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시단에 나왔다. 창작 동인 ‘뿔’의 멤버이며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가 있다. 이번 시집이 그에게는 첫 시집이다. 「우리가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은 회고지향의 그림이 보이는 작품이다. 첫 행이 ‘지난 일이다’로 시작된다. 과거를 돌아보는 자세다. 옥상에서 화자는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으며 서울행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기억을 소환한다. 어려서 아이들이 죽인 것들이 자랐다면 달리는 열차만한 크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가 항로를 틀었다. 아직 봄은 멀고 하늘도 높아 눈발이 날릴지 모른다. 창비 간 『네가 울어서 꽃이 핀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거울 임선기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나를 본 적이 없네 나를 본 적 없으니 거울은 진실이군. 그래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거울의 관대함이여! 거울은 원래 물이었다지 물만한 거울 어디 있으랴 임선기는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났고 1994년 『작가세계』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은 『호주머니 속의 시』였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거울」은 언어의 극한에 오래 머물다 돌아온 시인의 작품답게 차고 시리며 명징하다. 거울 속에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고백은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자탄의 목소리다. 외형으로 보이는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게 거울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신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일부라도 보여준 거울은 관대하다. 따지고 보면 거울 이전의 사람들은 물속에 비친 자신을 보는 것으로 거울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물 만한 거울이 어디 있겠는가. 창비 간 『피아노로 가는 눈밭』 중에서. 김윤배/시인
웃음의 진화 임지은 코메디 프로를 봅니다 우리가 같은 프로를 보는 게 맞나? 할 정도로 너와 나의 웃음 포인트가 다릅니다 웃음은 만국 공통어라던데, 웃는 얼굴에는 침도 뱉을 수 없다던데 웃을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략) 웃음이 진화하면 사랑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모두 울고 있습니까? 너무 사랑해서 웃음을 아끼고 있는 겁니다 임지은은 198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2015년『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무구함과 소보로』와 이번에 출간한『때때로 캥거루』가 있다. 「웃음의 진화」는 함께 보는 코미디 프로에서 서로 웃음 포인트가 다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입니다. 소통의 부재를 말하는 시로 읽힙니다. 사랑은 그처럼 엇나가는 웃음의 포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엇나가는 웃음이 진화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하게 되면 사람들은 웃지 않고 운다는 겁니다. 사랑은 슬픔이라는 겁니다. 너무 사랑해서 웃음을 아끼기 위해서 운다는 겁니다. <문학과지성사> 간 『때때로 캥거루』 중에서. 김윤배/시인
사카린 프로젝트 박지일 나의 습관은 막 얼어붙기 시작하는 해변에다 나를 던져놓았다 홀로 뒷모습 하며 걸었다 얼어붙어라 그대로 잠들라 해변 얼어붙기만을 기다리는 당신들 숨소리가 이곳의 나를 꽝꽝 두드린다 박지일은 199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립싱크 하이웨이』는 그의 첫 시집이다. 그 시집 속에「사카린 프로젝트」가 수록되어 있다. 1966년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가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일본에서 사카린을 대량으로 밀수입한 사건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다루어진 사건이었다. 사카린은 설탕의 300배의 당도를 가지고 있다. 화자는 해변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있다. 해변은 추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 할 때다. 그의 습관이다. 그리고 걷는다. 얼어붙으라고, 그대로 잠들라고 주문하며 걷는다. 해변이 얼어붙기만을 기다리는 당신들은 독자들일 것이고, 독자들은 화자가 얼어붙기를 기다리며 그를 꽝꽝 두드리는 것이다. 사카린 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다. 시제「사카린 프로젝트」는 어디서 왔을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시다. <문학과지성사> 간『립싱크 하이웨이』 중에서. 김윤배/시인
폭우 권박 뼈가 쏟아진다 전생의 일이다 왜 뼈가 지금도 쏟아지는가. 왜 나는 아직도 맞고 있는가. 권박은 1983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2012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시에는 각주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녀는, 각주는 시문이라고 말한다. 본문의 몇 배나 되는 각주는 그녀의 시의 핵심 메시지로 시에 작용한다. 「폭우」에는 각주가 없다. 다행이다.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폭우로 내리는 빗줄기를 뼈의 이미지로 본 것이 이 시의 비의다. 뼈가 쏟아지는 것이다. 뼈가 쏟아지는 것은 전생부터 있었던 일이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뼈로 보았다면 강철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숲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근심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절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뼈가 왜 지금도 쏟아지는가?라고 묻는다. 뼈는 후에도 쏟아질 것이다. 아주 먼 미래에도 뼈는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독백한다. 왜 나는 아직도 그 뼈를 맞고 있는가?라고. 이 부분은 실존적이다. 살아 있으므로, 이 땅에 존재하므로 비를 맞는 것이다. 화자는 이 땅에 살아가는 현존재인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간 『아름답습니까』
라피스라줄리 함성호 라피스라줄리 끝없는 하늘이여! 십칠 년간 유폐 그 아래로 경전을 짊어진 젊은 파계승 쿠차의 왕자 오아시스를 건너 물의 도시에 라피스라줄리 끝없는 하늘이여! 함성호는 1963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1990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는 이번 시집의 제목을 <타지 않는 혀>로 정했다. 구도자이며 파계승이었던 쿠차 왕국의 왕자 구마라집의 불교 경전에 심취한 듯하다. 타지 않는 혀는 구마라집의 화장 후에 그의 타지 않은 혀를 의미한다. 라피스라줄리는 청금석이라고도 하는 보석의 일종이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구조를 가진 광물로 벽화의 푸르고 깊은 색은 이것으로 만들어 썼다. 「라피스라줄리」는 청금석에 대한 예찬이며 파계승 쿠차의 왕자 구마라집에 대한 헌사다. 라피스라줄리의 푸른 색깔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끝없는 푸른 하늘이다. 그리고 파계승으로 미녀 열 두 여자와 십칠 년을 살았던 구마라집을 호명한다. 그 파계승이 오아시스를 건너 물의 도시로 오는 것이다. 물의 이미지는 라피스라줄리다. 끝없는 하늘이다. <문학과지성사> 간 『타지 않는 혀』중에서. 김윤배/시인
치맛자락 전봉건 비가 오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꽃이 피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나비 가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아 그러다 한 잎 꽃잎이 지면 전쟁이 아니라 오신 당신의 펄럭이는 연분홍 치맛자락의 탓이다 알겠습니다 전봉건(1928~1988)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했다. 1950년 『문예』지에 「사월」외 2편이 서정주와 김영랑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나왔다. 1969년에『현대시학』을 창간했다. 「치맛자락」은 연시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애절한 마음이 녹아 흐르는 아름다운 노래다. 비가 오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꽃이 피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나비가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그렇게 기다리다 한 잎 꽃잎이 지면 전쟁이 아니라 당신의 펄럭이는 치맛자락 탓이락 알겠다는 절절한 고백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중에서. 김윤배/시인
원두막 김종삼 비 바람이 휘청거린다 매우 거세이다. 간혹 보이던 논두락 매던 사람이 멀다. 산마루에 우산 받고 지나가는 사람이 느리다. 무엇인지 모르게 평화를 갖다 준다. 머지않아 원두막이 비이게 되었다 김종삼(1921~1984)은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했다. 1951년 「돌각담」을 발표하며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전봉건, 김광림 등과 삼인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는 죄의식을 시속에 드러내며 삶의 참담함을 노래했다. 「원두막」은 전형적인 서정시다. 화자는 원두막에 앉아서 거센 비바람을 본다. 논두락 매던 사람이 멀리 보이고 산마루에 우산 받고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이 느리다. 그 풍경이 평화스럽다. 머지않아 가을이 올 것이고 원두막은 비게 될 것이다.『한국전후문제시집』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