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사소한 것은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만큼 대수롭지 않고, 금방 잊혀질 만큼 크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마음이 움직이고, 작은 이유가 원인이 되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호기심 때문에 충동 구매한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계기도 사실 아주 사소한 이유이다. 작은 모래알이 마라토너의 완주를 포기하게 하며 작은 구멍 하나가 댐도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사소한 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여 낭패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건만 우리는 사소한 것을 잘 챙기지 않는다. 더욱이 사소함이 부정적 습관 또는 죄의 통로가 될 때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운다.’라는 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속담이 주는 교훈은 사소한 잘못을 가볍게 여기고, 개선하지 않고, 방치할 때 큰 댓가를 지불한다는 점을 가르켜준다. 만일 한 건물의 유리창이 깨어진 채로 방치되어있다면 다른 유리창들도 곧 깨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깨진 유리창이 방치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신호이기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쓰레기가 없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용인신문] 과거 언론을 통해 접하였던 아름다운 사례들을 생각할 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그와 같은 삶이 긍정적으로 파급되기를 소망해 본다. 첫번째는 어느 치킨집 사장님의 선행으로 한 어려운 이웃에게 무료로 치킨을 제공하였는데 이상황을 접한 네티즌들의 주문이 폭주하였고, 많은 양의 주문으로 오히려 맛을 잃을까 걱정한 사장님은 잠시 휴업한다고 하셨다. 두 번째 이야기는 어려운 환경의 학생이 마트에서 먹을 것을 구입하던 중 온전하게 돈을 지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어느 여대생이 햇반과 햄, 기타 간식 등을 구입해 주며 토요일 오후 1시에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이후 도움을 받은 학생의 어머니가 여대생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여대생은 학생이나 어머니께 동정심으로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래서 여대생은 SNS를 통해 괜찮으시다면 토요일에 마트로 학생을 보내 달라고 했다. 선함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 선한 일에 함께 동참하는 네티즌들이 만드는 우리들을 미소 짓게 하는 아름다운 내용이다. 분명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선한 일에 대한 마음을 다양한 교육현장을 통하여 실천할 수
[용인신문] 추운 겨울이 또 한 번 지나갔다. 어리둥절하며 보내버린 시간 속에 어김없이 연초록 나뭇잎들이 돋아났다. 해마다 3월의 첫 학기가 시작할 때면 내 마음속 설렘도 함께 찾아온다. 이번엔 어떤 신입생들이 학교에 입학했는지, 또 어떤 학생들을 만나게 될지 등을 생각하면 설렘으로 기대감이 커진다. 학생들이 학기를 시작할 때면 학교도 가정도 분주해진다. 이 학생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학업에 즐겁게 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들의 마음도 바빠지는 시간을 보낸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어려움들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허락되지 않기를 바라고, 혹은 이미 주어진 어려움 앞에 있는 아이들이 잘 뛰어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 주려 노력해본다. 매 새학기마다 찾아오는 이 분주함 속에서도 묵묵히 수고하는 사랑의 손길들을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은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본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 ‘시작’이 찾아왔을까? 시작이라는 단어가 낯설진 않았는지, 나이를 어떻게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저 쳇바퀴처럼 흘러가는 세월과 어깨동무를 한 채 모든 것들을 바라만 보고 있진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미 수많은 시
[용인신문] 언젠가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제에게 메일을 하나 보내 주셨습니다. 그 메일에는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한 아프리카의 아이가 아사 직전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식량센터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배가 고파 기진하여 더 이상 가던 길을 가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가 있는 사진입니다. 한 동안 이 사진을 보고 먹먹한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인적으로 저는 지구촌교회를 1997년에 갔습니다. 잠시 일 년 정도 지구촌교회를 떠난 것 외에는 횟수로 약 20년 정도 한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신동탄지구촌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 지구촌교회를 왔을 때 저는 주일학교 교사로 시작했습니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배우겠다고 주일학교 교사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만큼 감사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뭐든지 시켜만 주면 감사했습니다. 찬양을 시켜주면 그게 너무 감사하고, 주일학교를 시켜주면 그게 너무 감사하고…. 뭔가를 맡겨주
[용인신문]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입대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훈련소 생활을 합니다. 훈련소에서는 인터넷도 전화도 쓸 수 없기에 참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밤에 받아보는 부모님과 친구의 편지입니다. 흰 종이에 쓰인 몇몇 글들이 어찌 그렇게 절절하고 달콤하던지요! 밤에 편지를 받아보고, 읽고 또 거기에 담긴 부모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힘든 훈련소 시절을 버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1절은 “너희가 고난중에 있느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하여 여러 가지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인 성경을 묵상하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모든 어려움을 견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어떠함을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나눠보겠습니다. 첫 번째, 직접 시험 받으시고 도우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심으로 지금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 이십니다(히2:18).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울수록 더 깊이 예수를
[용인신문]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공부 잘하기를 원한다. 그건 바로 우리 자녀들이 그들의 인생을 좀 잘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방식의 공부를 시켜서 그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시킨다고 해서 그 인생이 정말 잘살게 될 수 있을까? 부모가 그 자녀의 인생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진짜 공부, 제대로 된 인생 공부를 어릴 때부터 시켜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공부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니다.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쓴다. 이것을 한국말로 읽으면 공부가 되고, 중국말로 읽으면 쿵푸(gōngfu)가 된다. 쿵푸의 한자는 엄밀하게 따지면, 功夫지만, 원래는 무술공부(武術工夫)라는 말에서 뒷 단어 공부를 강조하여 쓰여진 말로, 발음과 의미적으로 한국의 공부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기술이나, 지식, 무엇인가를 익히고 배워서 체득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 중국어 쿵푸이고, 우리 말로는 공부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전에 공부, 쿵푸를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배우고 익혔는가? 우리가 많이 봤던 예전 중국 영화를 떠올리면 된다. 강호의 세계에서
[용인신문] 사람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삶이 전혀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방법은 달라도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에 한 두 번 정도는 그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이 꿈꿀 수 없는 대박이 터지는 일이 자기 인생에 일어납니다. 저의 인생에도 그런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경주의 작은 시골에서 포은 정몽주 후손인 뿌리 깊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한문 교육과 조상 숭배를 위해 제사 의식을 중요시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환경의 영향으로 저는 유교적인 전통에 관심이 많아 훗날 문중의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고등학교 시절에는 수업 시간에 학과 공부보다 한자 공부에 열심을 내기도 했고, 대학 시절에는 국립 도서관에 가서 족보 연구와 풍수지리, 사주, 궁합 등 주역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며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들의 산소를 찾아다니며 그 비문의 탁본을 뜨는 일을 즐겼습니다. 이런 저의 삶에 전환점이 온 것은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선교 단체를 다니는 같은 과 친구가 저에게
[용인신문]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 이때의 진주를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른다. 아마도 딸이 시집살이 하다가 속상해할 때 조개가 살 속에 모래알이 박힌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잘 참고 견뎌내라는 뜻일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른다. 시련이 찾아올 때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라. 오늘 흘리는 눈물은 내일 아름다운 진주가 되게 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장자권을 소홀히 여긴 에서가 야곱에게 축복권을 빼앗기고 방성대곡하며 울었다. 한나가 브닌나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다. 인생에는 원치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고, 절망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는 사람은 더 강해진다. 더 성숙해진다. 시편 84:6-7절에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
[용인신문] 얼마 전에 00유업 창업주 외손녀로 알려진 황00씨가 마약 관련 혐의로 구설수에 올랐다. 일반인들의 관점에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왜 그런 일탈 행위에 빠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한때 우리나라 특급 탤런트였던 최진실씨도 성공의 정상 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몇 년 전엔 아이돌 가수였던 샤이니 종현씨도 우울증을 이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돈과 인기와 명예를 다 가지고도 왜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러면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한가? 인생에는 세 가지 딜레마가 있다. 첫째,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돈으로도 성공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상처가 있다. 그것은 곧 마음의 괴로움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정에서 또는 다른 이유로 생긴다. 성공하면 해결될 것 같아 열심히 달려왔는데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외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마음은 괴롭다. 아마 그 괴로움을 달래고자 여러 일탈 행동과 중독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 또한 인생의 큰 딜레마다. 둘째, 돈으로도 성공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가 있다
[용인신문] 예전에 맘바바랑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다. 맘바바랑은 저주를 내리는 마법사이다. 맘바바랑은 의뢰인으로부터 돈을 받으면 자신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매일 저주를 내리는 주문을 외운다. 그런데 맘바바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마지막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나왔다. 왜냐면 저주를 내리는 마법사가 교회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영상을 촬영하던 사람도 당혹스러워서 맘바바랑에게 무슨 기도를 하는지 물었다. 맘바바랑의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는 독실한 신자다. 나는 능력 있는 ‘맘바바랑’이 되기 위해 저주를 내리는 능력을 달라고 항상 기도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사람을 죽이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면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6장 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용인신문] 코로나 19 팬데믹(Pandemic)이후 가장 중요한 방역의 핵심 세 가지로는 마스크 쓰기, 서로 서로 거리두기, 손 잘 씻기 등으로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코로나 팬데믹에서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3가지 핵심 방역 수칙처럼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3가지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첫 번째는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걱정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한다고 우리의 삶이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니 젤린스키는 그의 책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인간의 염려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통계를 적고 있다. “우리 인간이 갖는 걱정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아주 사소한 고민이다. 나머지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며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라고. 결국 한마디로 걱정이라는 것은 100%가 쓸데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생활의 염려가 우리 마음을 둔하게 한다고 말씀
[용인신문] 필자는 신학생 시절부터 현장에서 교회를 섬기는 담임 목회자였다. 외조부, 외조모로부터 이어받은 기독교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친가는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다. 그 갈등 속에서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이혼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학대를 당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남달리 강하고 열정적이었다. 신학 과정을 공부한 후 현장 목회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전인적으로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정 사역, 목회 상담학, 치유신학 등을 공부하면서 직면한 성도들과 수많은 내담자의 숨겨진 깊은 상처들을 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해와 공감과 자비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게 되었다. 마치 설교는 상수도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 구원받는 성도, 변화되는 성도, 치유되는 성도 등 많은 열매가 있었다. 동시에 가정 사역, 상담, 치유 등은 하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십 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밤, 새벽 1시가 조금 지나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직감적으로 큰 사고가 났거나 심각한 상담 전화일 것으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