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예는 민본주의를 기본으로 공자의 덕치예교 사상에 대한 실천덕목으로 가는 도덕적 첫 관문인 셈이다. 맹자는 군주의 제일 덕목을 백성의 등따습고 배부름에 기초한 왕도정치로 규정한다. 그 첫 관문이 또한 무흠을 전제로 한 도덕성이다. 군주와 군주를 둘러싼 가족과 측근들이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하다가 아니라 맑지 못하다거나 흐리거나 혼탁하거나 의혹 같은 것만 있다 해도 그런 군주는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갈아치워 백성의 뜻을 존중하는 군주를 세워야 한다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그 옛날, 무지했을 것만 같았던 시대에도 이런 개명한 생각을 했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예가 무너짐에서 비롯됨은 아닐까. 논어에서 예를 처음 말한 이는 공자의 제자 유자이다. 논어 학이편 1-12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군주가 예를 백성들에게 사용함에 있어서 예의 쓰임은 화를 귀하게 여긴다. 여기서 화는 화목할 화和를 쓰는데 송나라 육전의 풀이에 따르면 화和는 벼화禾에 입구口라 하여 백성들은 먹을게 풍족해야 화목할 수 있다 한다.
제나라 환공 때 명재상 관중도 “백성을 예로 다스리되, 그 첫 번째 조건은 백성들의 집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옛말에는 곡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로 읽히기도 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말한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가 백성을 일일이 돌아보기는 불가능할 터 그래서 사람을 쓰는 거다. 이쯤에서 어리석은 군주와 어진 군주가 드러난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군주는 늘 호가호위하는 측근들과 곡학아세하는 신하들로 득실댄다는 것이 역사가 보여준 사실들이다. 이쯤에서 군주는 치술治術이 요구된다. 그런 자들을 과감히 내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군주가 아둔해 어리석음이 하늘을 찌른 탓에 그런 자들이 되려 충신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있다. 고을수령이 된다는 것은 고을 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한다는 것이며, 나라의 임금이 된다는 것은 나라 안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한다는 말이다. 집이 없으면 집을 지어주면 될 일이고,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면 될 일이고, 일자리가 없으면 일자리 만들어 주면 될 것을, 그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던가.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어 달라는 것도 아닌데 명색이 임금인데 이 정도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