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미수를 앞둔 86세의 들꽃 박청란 시인이 첫 시집 ‘꽃이 나에게 말한다’를 도서출판 별꽃에서 펴냈다. 여전히 수줍음 많고 새댁처럼 고운 박 시인이 생애 첫 시집을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하며 함박웃음을 지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원삼면 두창리 호수 변 그림같은 전원주택에서 남편과 함께 살았던 들꽃 박 시인은 ‘동구밖부터 골 안까지 꽃씨를 심느라 비지땀을 쏟았던’ 기억을 시에 고스란히 담았다. 동네에서는 그녀를 꽃 할머니라고 불렀을 정도로 꽃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백암으로 이사를 간 지금도 집 주변에 온통 꽃과 나무와 식물을 정성스레 가꾸며 살고 있다.
이번 시집은 박 시인의 유년과 남편, 자식, 가족, 두창리 전원주택의 꽃과 나무, 두창리 호수와 구봉산 자락을 모티프로 하여 담담하고 잔잔하게 시인의 마음을 써내려 갔다. 그녀는 가족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때로는 수채화같은 맑은 색조로, 때로는 수묵화처럼 묵직하고 그윽한 흑백의 대비로 시간과 공간의 시어를 건져 올리고 있다. 자신의 속을 가감 없고 꾸밈없이 내보이는 유리알같은 투명한 고백은 가슴 저리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식전 구백리라고/ 해 나기 전에 한다는 것이/ 오전 내내 밭에 매달려 김을 맨다// 거실에 있던 영감이 창문을 열고 말한다/ “그만 들어와 쉬어, 더위 먹으면 어쩌려고”/ 김매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묻는다/ “지금 몇 시쯤 됐어요?”/ …// 영감과 마주한 밥상/ 곰 발바닥만 한 상추에 밥 한술 푹 떠서/ 입 터지면 어쩌려고……/ 풋고추에 된장까지 찍어 한입 깨문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어찌나 맛나던지“(‘시장이 반찬’ 부분)
수많은 습작 노트 중에서 추려낸 시여서 싱싱하고 건강했던 그날의 순간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두창리 호수와 구봉산의 아름다운 4계가 빛난다.
“거실에 서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다/ 눈발이 바람에 쏠려 거실까지 들어온다/ 눈 속에도 호수에는 물오리 떼 지어 놀고/ 구봉산은 떡고물 뿌려놓은 듯/ 하얀 눈꽃을 피우고 말없이 조용하다”(‘눈 오는 날에’ 부분)
이번 시집에 대해 김종경 시인은 “포도송이처럼 붙어살던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은 둥지, 황혼녘에 서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시인의 마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했다.
한학자 우농은 “박 시인은 꽃을 심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달력을 찢어 바닥에 엎드려 썼다”며 “꾸밈없는 시어들이 찬바람이 불지 않아도 시린 계절을 어루만지고 있다”고 했다.
자식도 품을 떠나고, 남편도 작고한 지금 박 시인은 한 때 “손끝이 얼얼해”질 정도로 꽃씨를 뿌리던 시절을 뒤로 한 채 시 ‘꽃 심을 곳을 잃고’에서처럼 “꿈결같이 지나가 버린” 세월의 쓸쓸함을 노래하고 있다.
회상과 추억, 그리움, 고독같은 가을의 정취로 가득한 이번 시집에서 박 시인은 덧없이 흘러가버린 무상한 세월에 야속함을 느끼지만 평생동안 무수히 맞이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꽃과 두창리 호수, 푸근한 구봉산, 새, 나무들의 위안 속에서 여리지만 강하게 세월에 맞서 오늘도 꽃 한송이를 어루만지는 감정의 절제를 피워내고 있다.
박 시인은 ‘한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동인시집으로 ‘동행’ ‘들꽃’ ‘막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