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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픽션에서 게임 모드까지: 이야기의 확장된 생명력

안수연(동화작가, 문학박사, 게임 스토리텔링 강사 및 연구자)

용인신문 |

이야기는 더 이상 책이나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서사의 경계를 넘어서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며, 다시 쓰인다. 독자가 작가가 되고, 관객이 연출가가 되며, 플레이어가 창작자가 되는 이 세계에서 이야기는 하나의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되고 진화하는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팬 픽션, 유튜브 리믹스 영상, 게임 모드, 그리고 SNS 기반의 캐릭터 역할극이다. 각각의 사례는 이야기의 원형이 디지털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얻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란 더 이상 원작자 한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상상력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공동의 창작물이자, 살아 있는 세계다.

 

팬 픽션은 이야기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독자들은 기존의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에 등장한 캐릭터와 설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원작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관계를 성사시키거나, 배경을 바꾸어 전혀 다른 상황을 상상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조연이 중심이 된다면? 팬 픽션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해, 원작과는 또 다른 시간과 감정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한 번 출판되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수많은 손에서 다시 살아나는 세계다.

 

유튜브의 리믹스 영상도 서사의 확장된 생명력을 보여준다.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게임 속 장면을 편집해 감정선을 재구성하거나 전혀 다른 분위기로 탈바꿈시키는 이 영상들은, 원작이 담지 못한 뉘앙스와 감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한다. 어떤 영상은 주인공의 시점만을 강조하고, 어떤 영상은 전혀 다른 장르처럼 재편된다. 공포 영화가 코미디로, 로맨스가 미스터리로 바뀌는 이 순간, 우리는 기존 서사의 경계가 얼마나 유연하고 개방적일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게임은 그 자체가 서사의 플랫폼이 되면서 훨씬 더 능동적인 이야기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모드(Mod)’는 기존 게임 세계에 직접 개입해 새로운 규칙, 캐릭터, 스토리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좀비 게임에 마법 세계를 도입하거나, 현실 배경의 게임에 SF적 요소를 추가하는 등, 게임 모드의 세계는 끝없는 재창조의 장이다. 이때 플레이어는 단순한 이용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공동 창작자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저 기반 창작은 때로는 원작보다 더 큰 인기를 얻고, 또 다른 확장 세계로 이어진다.

 

SNS에서의 캐릭터 역할극도 빼놓을 수 없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공간에서는 유명 작품의 캐릭터가 현실의 시간과 언어로 살아가는 듯한 콘텐츠가 펼쳐진다. 팬들은 캐릭터가 운영하는 계정을 팔로우하며, 댓글을 남기고, 상호작용하며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 가상의 인물이 디지털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현상은, 이야기의 생명력이 한 개인의 창작을 넘어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디지털 시대의 서사는 닫힌 구조에서 열린 공간으로, 소비의 대상에서 참여의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더 이상 이야기는 작가의 손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팬과 유저, 독자와 시청자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변형하고, 심화시킨다. 그렇게 확장된 이야기는 끊임없이 살아 있는 채로 우리 곁에 머문다. 이야기의 생명력은 이제 ‘공동 창작’이라는 새로운 호흡으로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