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사람을 큰 저울위에 올려놓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지켜보는 기이한 실험이 있었다. 죽는 순간 영혼이 육체를 떠날테니 만일 영혼이 물질적 구조를 가졌다면 시체의 무게가 그만큼 가벼워 질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인격에 무슨 물량적인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사람이 가볍다느니 혹은 무게 있는 인격이니 하는 표현을 가끔 듣는다.
확실히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식을 활용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선인들보다 지혜롭다거나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거나 또는 그만큼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는 없을듯하다.
그 사람의 삶의 자세는 그가 처한 사회의 구조나 변화의 속도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각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구조가 단순하고 변화의 속도가 완만한 사회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그 안에 자신의 역할을 신중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선인들에 비해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속도 빠른 변화를 체험하면서 현대인들은 그 사람됨의 무게를 차츰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의 인격은 언행을 통해 드러날 뿐 아니라 바로 그 언행을 통해 형성되어간다.
따라서 그 언행이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 경우 사람됨의 양면성을 가지게 되거나 기준 없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의 교리는 일치된 바른 언행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화두에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상이 혼란할수록 종교와 관련된 각종 시끄러운 일들이 뉴스가 되고 있다.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에 종교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책무와 본질보다는 자신들의 탐욕과 세속적 욕망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 일것이다.
때론 교리를 앞세워 자신의 정당성과 의를 주장하고 상대를 괴롭히는 무지한 일 조차도 합리화 시키는 웃지 못할 일까지 있다.
종교의 본질은 외형적 건물과 주문처럼 외쳐 대는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강조한바 있거니와 이 말은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사람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 되고 있다.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건 사람됨의 최종적인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이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히려 우리사회가 복잡해지고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가기 때문에 이 책임의식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가치관이 달라도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자의 의식을 잊지 않아야한다. 특히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덕목중 하나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책임질 일거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직접 나서서 책임질 일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책임질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할 때 지도자로서 그 리더십은 더욱 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인격적인 사람이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