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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국보는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대한민국 야구역사에 가장 빛나는 두 개의 별이 졌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격천재 장효조씨가 유명을 달리하자 그와 말벗이라도 하려는 듯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뒀던 최동원씨가 손에 야구공을 쥔 채 뒤를 따랐다.

애석한 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는 중년이 있는가 하면 야구 꽤나 안다는 일반인들은 두 사람이 야구실력은 최고였으나 인간성이 부족했다거나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했다며 수다를 떤다.

두 선수 모두가 삼성이나 롯데구단에서 감독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 하는 분분한 의견이다.

롯데감독 김용희씨는 증언한다. “장효조처럼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를 보지 못했다”고. “그렇게 예의바른 선수를 보지 못했다”고도 했다. 프로야구 홈런왕 출신 김봉연씨도 증언한다.

“최동원에게 겨우 내야안타 치고 1루에 서있으면 그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선배님 파이팅’하고 웃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충만한 선수 아니냐.”고. 기실 그랬다.

장효조는 방망이 하나로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방망이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 때면 그 자신감으로 뻗친 기운이 중국 황제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최동원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최동원은 타자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칠 수 있으면 한 번 쳐보라는 배짱으로 가운데로 공을 넣어주기도 했다. 선수시절의 장효조에게 타격지도를 구하면 “나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대답할 정도로 성실함 그 자체의 장효조였다.

최동원에게 타자를 위압하는 것이 건방진 행동 아니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겨루는 것이 타자에 대한 예의다”라고 답하는 승부사 최동원이었다.

‘건방지다’는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최동원이 88년 ‘선수협의회’를 만들기 위해 나섰기 때문은 아닐까? 연봉 1억 원이 넘는 선수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받는 선수들을 위해 나선 것이 그토록 괘씸했던 것일까? 장효조는 왜 그토록 외로워했을까? 남들이 거들 떠 보지도 않는 이대호를 보고

“큰 체격을 가진 선수가 매우 부드럽다. 대성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던 그였다. 세상 사람들이 장효조와 같은 눈을 가지지 못한 것은 아닐까?

최동원은 연세대 시절 23연승, 87년 프로야구 롯데에서 27승을 올린 당대 최고의 투수였다. 아니 프로야구 30년사를 통틀어 다시 볼 수 없는 투수였다.

장효조는 프로야구 통산타율 3할3푼1리를 때려낸 타격도사였다. 손으로 던져도 맞추지 못 하는 곳에 배트를 휘둘러 공을 보내는 전무후무한 타자였다.

삼성과 롯데구단은 이들의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 구장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이들의 유니폼을 걸어놓아야 한다.

다시 볼 수 없게 된 이들의 모습을 야구장에서 사진을 통해서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690만 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길이다.

야구인들도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해야 한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말했다. “내가 무적 스페인함대를 무찌른 넬슨제독보다 나을 수는 있으나, 이순신 장군에는 미치지 못한다.”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잃었지만 ‘전설’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