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권평화 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가족을‘신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선물은 가족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배우고 성장하고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용인시가 권장할 만한 도서를 선정해 용인시민 모두가 함께 읽는 독서캠페인으로 펼치고 있는‘한 책, 하나된 용인’으로 2009년 신경숙 작가의 소설‘엄마를 부탁해’가 선정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미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이 소설이 이처럼 모두가 공감을 하는 것은 가족의 정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인들이 함께 공감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3대가 함께 사는 집이 많았습니다. 대청마루나 방에서 가족들이 오손 도손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나는 조실부모하여 조부모 슬하에서 성장하다 보니 부모님과 밥상을 마주해보지 못했습니다. 삼촌 한 분이 있었으나 항상 조부께서는 손자와 '겸상'을 하였습니다.
직사각형의 밥상은 무늬를 새겨 넣은 고급스러운 나전 칠기 목·공예품 밥상이었고 나머지 가족은 둥근 밥상에서 여러 명이 빙 둘러 앉아 밥을 먹었습니다. 나는 조부님과 겸상하고 밥상머리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식사를 할 때의 예법부터 친족간의 호칭과 집안의 시조, 조상의 내력, 사람 살아가는 도리, '삼강오륜', '소학' 등 청소년기에 필요한 유교적 인성교육을 마른 흙에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받으며 자랐습니다.
밥상머리 교육은 비단 나만 받고 자란 것은 아니고 50~70년대에 성장한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압니다.
그 당시만 해도 주거환경 자체가 한옥 구조가 많았고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이 많다 보니 자연히 3대가 한 집에 살며 손자`손녀와 자식의 가정교육은 소위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물 흐르듯이 이루어져 윤리·도덕 교육을 별도로 받지 않아도 건전한 인격형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학우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당하고 금품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정기적으로 상납하지 않으면 폭력으로 괴롭혀 심지어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는 중`·고등학생이 생기는 일련의 잘못된 현상은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은 주거문화가 서구식 주거 환경과 아파트 문화로 바뀌어 그나마 식탁에 둘러 앉아 가족끼리 식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아빠의 출근 시간과 자녀의 등교 시간, 귀가 시간 등이 모두 다르다 보니 식탁에 마주앉아 옛날처럼 '밥상머리' 교육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이 훨씬 많은 것으로 압니다.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오손 도손 대화도 나누면서 아빠나 엄마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밥상머리' 교육이 되살아나 인성교육이 자연스럽게 되어 학교 폭력이 사라지고 신명나게 학생이 학교에 다니며 학업성취의 보람을 느끼는 시절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환상적 기대일까요?
식탁의 의미는 긴긴 하루 일과를 따로 보냈던 가족들이‘맨정신’으로 처음 얼굴을 맞대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인 것입니다. 대화의 단절은 모든 인간관계의 적신호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족이 단결해 한 곳을 보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한 곳을 보려면 대화를 통해서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지 소통해야 합니다.
형편이 어려워져서 아이들 용돈을 줄이려고 해도 대화가 부족하면 오해부터 앞섭니다. 어느 조직이나 힘을 결집하려면 말부터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 그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구성원인 것입니다. 넘어지기 전에 손잡아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관계가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서로의 손끝을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서로 손잡아줄 타이밍을 농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가족의 꿈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