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운무화
이원규
몸이 무너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너무 쉬운 여자는 지루하고
너무 뻔뻔한 남자는 지겨워서
저잣거리는 침침하고
산중 헤매는 것도 심심해서
7년 동안 모터사이클 타고 별종 위기 야생화를 찾아다녔다
바위 뒤에 숨은 아이
산그늘 깊이 무너진 남자
아예 얼굴을 지워버린 여자
안개 치마를 입고 구름 이불 덮어쓴
몽유운무화夢遊雲霧畵
저 홀로 훌쩍이는 꽃을 찾아
지구에서 달까지 38만 4300킬로미터
오지의 야생화들이 병든 나의 폐를 살렸다
이원규는 지리산 시인이다. 어느 날 기자로 일하던 서울살이를 훌쩍 떠나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21년째 살고 있다. 1990년 청사민중시선으로 출간된 시집 『빨치산 편지』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럴줄 알았다 했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 시사진집 『그대 불명의 눈꺼풀이여』와 시집 『달빛을 깨물다』를 동시에 출간했다. 지리산의 밤과 달과 별과 야생화와 바람과 숲과 계곡을 모터사이클의 굉음과 마음의 렌즈로 담아낸 서정적인 시편들이다. 시집을 받고 인사동, 출판기념회에 가겠다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것을 이 지면으로 대신한다.
몸이 무너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야생화였다. 일상이 지루하고 지겹고 심심해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리산을 누볐을 것이고 멸종 위기의 야생화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을 것이다.
멸종 위기의 야생화는 바위 뒤에도 숨어 있었을 것이고 산그늘 깊이 무너진 사내 같았을 것이고 얼굴을 지워버린 여자 같았을 것이다. 저 홀로 훌쩍이는 꽃을 찾아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달리는 동안 병든 그의 폐를 살렸을 것이다. 시집『달빛을 깨물다』에서.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