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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사람 용인愛

이제 ‘용인사람’이란 벽을 허물자

박성수(사회적일자리연구소 소장)

 

[용인신문]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책의 집필 동기를 자신의 아내가 겪은 일화를 통해 설명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내는 학교를 몹시 싫어해서 차라리 퇴학당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 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그런데 왜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니?” 라고 묻자, 그의 아내는 “그래도 되는 줄 몰랐어요.”라고 답했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을 집필한 동기와 같은 동기로 이 글을 쓰고 있다.(물론, 주장하는 내용은 책 내용과 전혀 관계없다.) 추측하건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수많은 사조와 이념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도덕과 관습들에 대해 한번쯤 불편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논쟁과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체계화 된 도덕과 관습들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한다. ‘신 앞에 단독자’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구체적 삶의 정황 속에서 날마다 부정된다. 우리는 누구도, 어떤 순간에도 완벽하게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로부터 강요된(혹은, 학습된) 삶의 방식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좀 뜬금없지만 나는 용인에서 ‘용인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종종 본다. 일종의 ‘용인사람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사업적, 정치적 심지어 지극히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상대가 ‘용인사람’인지를 검증한다. 이때 검증의 도구는 대체로 ‘용인에서 태어났는가’, ‘용인에서 학교를 다녔는가’ 정도다. 용인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위 조건을 충족 못하면 그는 이방인이다.

 

지역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학연과 혈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용인사람’ 이어야만 진심으로 ‘용인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 ‘용인사람’이 될 수 없는 이방인들은 경쟁적으로 ‘용인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착각에서 벗어나자. 용인은 ‘용인사람’의 네트워크만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다. 용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만이 반드시 용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출생지역과 출신학교로 높게 쌓아올린 ‘용인사람’의 벽을 이젠 좀 허물어 버리자. ‘용인사람’의 정체성을 담보로 안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것을 당위로 여기는 이들에게, 동시에 ‘용인사람’의 정체성을 올무로 여겨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전하고 싶다.

 

그래도 된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정해진 방식과 다르게 살아도 된다. ‘용인사람’의 카르텔에 속하지 않아도, 당당히 용인지역 공동체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도 된다. 당신의 결단과 선택에 따라 지금과 다른 삶은 충분히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