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주당과 유한규 합장묘
이사주당기념사업회에서 묘소를 찾아가는 가을여행
귀천 차별없는 인본주의 학자
[용인신문] 모현읍에 세거했던 소론계 경화사족 진주류씨 목천공파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태교신기 저자 이사주당을 비롯해 그의 천재 아들 유희를 꼽을 수 있다. 천재적인 이들 두 모자지간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언급이 있었지만 사주당의 남편인 목천공파 파조인 애오자 유한규(1718~1783)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다. 최근 그의 아들 유희가 쓴 황고가장이 완역됨으로써 다소간의 실체가 드러났다. 유한규는 규합총서를 쓴 빙허각이씨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유한규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우선 훌륭한 인품과 성격이 돋보인다. 자신의 재예를 남들에게 자랑하기 꺼려했으며 미천한 사람이 찾아와도 홀대하지 않고 깊이 이해해주었고, 상벌은 정확했다. 일을 추진함에서도 치밀, 신중했다.
유한규는 학문과 사상에도 뛰어나 성리학은 기본이고 수학에 뛰어났으며 온갖 잡학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유희는 아버지의 학문에 대해 ‘문학에 깊고, 백술(百術)을 꿰뚫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한규는 시와 서예, 음악도 출중했지만 특히 이과 방면에 소질이 뛰어났다. 총명해서 한번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 잊어버림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아들 유희가 문이과를 넘나드는 백과사전적 저술을 남긴 것은 이같은 부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희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작고함으로써 11세부터 어머니 사주당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어린 유희가 부친의 가르침을 소화해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천재적 유희는 이미 한 살에 말귀를 알아듣고 두 살에 글을 알았으며 4살에 편지를 쓸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5살에 성리대전을 이해했으며, 7세에 사략, 통감을, 9세에 주역을 논하고 서경 요전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기삼백을 이해한 천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보면 유희는 아이큐 148 이상이 가입할 수 있는 멘사회원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한규는 어린 유희에게 음양의 소장과 64괘와 36궁과 절기와 율려 등에 대한 내용을 손수 그림을 그려서 조리를 정연하게 설명해 줬다. 또 유한규는 주수를 익혀 동생 유한기와 함께 ‘산학계몽’에 주석을 증보했고, 1781년에 서파 유희에게 ‘서경’의 ‘기삼백장’을 가르쳐주고 이로 인해 ‘기주주설’ 1권을 지어 집에 소장했다. 두진방, 응골방, 절작통편을 새로 증보하고, 율려신서, 산학계몽을 평찬했으며, ‘할원팔선도설’을 주석했다.
유한규는 이처럼 재주와 품격이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민첩했다. 어린 시절에는 날래고 용맹해 유협을 흠모하면서 아이들을 거느렸고 길에서 불공정한 일을 보면 곧장 구해줬다. 언사와 기색이 교만한 귀족 자제를 만나면 소매에 넣고 다니던 대나무 여의(등긁개)로 때렸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큰 소리로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동기생 윤득림이 “언론이 호탕하고 의용이 단정하니 우리들은 그를 따라갈 수 없는 천선(天仙)처럼 바라본다”고 했을 정도다.
둘째 부인 평강전씨 집안의 전성천은 호남좌도의 거목으로 칭송받았는데 재예로 유한규를 시험하고자 6, 7명의 뛰어난 선비를 모아 밤마다 한사람씩 번갈아가며 유한규와 설전을 벌이게 했다. 유한규는 새벽까지 그들을 응대했는데 결국 찾아온 선비들 실력이 바닥나자 서로 감탄하며 “기이한 사람이로다”라고 했다.
유한규는 활을 잘 쏘았다. 작은 과녁을 쏠 때 대적할 만한 이웃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활 쏘는 법칙을 터득해 마을에서 활쏘기 시합을 하면 반드시 마산(모현면 마을)에서 으뜸이었다.
뿐만 아니라 홍역에도 정통해 ‘두진방(痘疹方)’을 수정 윤문할 정도였다. 1775년에 마진(홍역)이 세상에 크게 유행하자 “나는 홍역을 앓는 아이를 살펴보면 그 오장육부를 훤히 안다”며 치료에 나섰다. 가까운 마을에서 유한규를 만나 살아난 자가 1000명을 헤아렸고,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는 성을 유씨로 바꾸기도 했다.
말, 소, 매, 닭을 사육하는 방법에 정통했으며 수렵과 낚시를 즐겼고, 사람의 관록과 운명을 잘 헤아렸고, 천문관측기구를 잘 다뤘으며 관상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둑과 골패 같은 놀이는 적수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인재교육면에서도 성심을 다했다. 잔글씨 쓰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자가 솜씨가 둔해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야기를 듣고 그를 오라고 청해 머물게 하고는 수백장의 종이를 소비해 글씨 연습을 시켰다. 그 사람이 팔이 부어서 도망가려고 했을 정도다. 몇 년 후 솜씨가 완성되자 그를 놓아주었다. 이웃 젊은이가 가르침을 들으러 찾아오면 반드시 편안하고 정성껏 마주 대했으며, 새벽이 되어서야 그칠 정도였다.
효성스러웠고, 자녀들에게는 곡진한 뜻으로 양육했으나 규율로써 다스렸고 훈계는 매우 엄하게 하고 잘못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문무를 겸비한 유한규와 관련된 일화 몇 개 속에서도 명문가 뿌리의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