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이씨시조 발상지비(디지털용인문화대전)
용인이씨 재실(용인이씨대종회 50년사)
이일장군의 여진족 국문장면. 경기도박물관본
[용인신문] 용인이씨대종회가 최근 종회 50년사(1971~2021)를 발간했다. 이와 함께 용인이씨 판관공파 중 장양공종회에서 ‘조선중기 장양공 이일장군 서거 7주갑 기념 재조명 ‘영웅’ 책자를 발간했다.
용인이씨는 인구수(통계청 2000년 현재 용인이씨 3만 2050명)에 비해 조선조의 문과, 무과 및 소과에서 많은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다.
우리나라 전체 4477개 성관 중에서 용인이씨 출신 문과 급제자 수는 86명으로 전국 48위이며, 무과 급제자는 202명, 소과 급제자는 256명이다. 조선조 전체 문과 급제자 1만 4620명 가운데 전기에 17명과 후기에 69명이 급제해 전체 8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특히 숙종조에 12명과 영정조 시대에 25명이 집중적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는 성관 10대 성씨 중 80명 이상 급제자를 배출하는 성관에서 해평윤씨, 양주조씨, 풍산홍씨, 동래정씨 다음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어 경화사족으로서 용인이씨 문중의 위치는 대단하다.
또한 문과 급제자에 비해 무과 출신자로서 크게 현달한 문중은 아니지만 202명이라는 적잖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일 장군은 그 가운데 돋보이는 걸출한 인물이다. 이일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이탕개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과 평양을 수복했다. 서울 탈환 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좌지사로 군대를 훈련했다. 묘는 용인시향토유적 제21호로 지정돼 있다.
급제자 가운데 요직에 올라 중앙정치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도 상당하고 명예로운 청요직에 오른 인물도 많으나 관직 성격상 한 인물이 여러 주요 관직이나 청요직에 오른 것이 용인이씨 문중의 특징이다.
조선조 중앙 관직자를 보면 정1품(국무총리급)은 세백, 의현, 재협 등 3명이다. 정2품 판서(장관급) 17명, 종2품 참판(차관급) 39명, 한성부 판윤(서울특별시장급) 14명, 종2품 관찰사(광역시·도지사급) 26명과 종1품 판의금부사(검찰총장급) 9명, 정2품 도총관(참모총장급) 5명이 있다.
그리고 타의 존경을 받는 영예로운 사헌부 대사헌(종2품 대법원장급) 16명, 사간원 대사간(정3품 감사원장급) 23명, 성균관 대사성(정3품 서울대학교 총장급) 12명, 예문관 대제학 3명(이의현, 의철, 삼현)과 문형 1명(이의현), 청백리 1명(이백지) 외에 유림세계에서 존경 받는 호당 1명, 기로소 4명, 봉조하 2명, 사화 5명, 배향 9명, 정려 14명, 공신 19명, 화가,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
16세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승람 인물조에 나오는 고려조 이중인을 비롯해 4명과 우거인물 고려조 이석지를 비롯한 3명 등은 모두 용인 출신의 용인이씨 가문 인물이다.
이사위는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유후에 이르렀고, 이백지는 이사위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다. 이길보는 이백지의 증손이며 경기도관찰사를 지냈고, 그의 아우 이우보도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우거 인물인 이종검, 이종겸은 모두 이석지의 손자다.
용인이씨 시조 이길권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태조가 고려를 개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용인지역 토호로서 큰 공을 세운 공덕으로 구성백, 고려삼한벽상공신 및 태사에 책봉됐다. 신라 말 헌강왕 6년(880)에 용인에서 태어난 이길권은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특히 천문지리에까지 통달했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도승인 도선대사가 장차 왕을 도와 큰일을 할 재목이라며 감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가 국운이 쇠해 혼미를 거듭하는 난세에 견훤, 궁예가 일어나 각각 후백제, 태봉을 세웠으나 신라 경명왕 2년(918) 혁명으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때 이길권은 용인지역 토호로서 왕건을 도와 궁예와 견훤을 평정하고 동예의 고부이 오환 등을 격파해 삼한을 통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왕건이 고려 태조로 즉위 후 5백호의 식읍과 산성군에 봉군했다. 태조는 또다시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숭록대부 태사의 벼슬을 내렸다. 사후에는 고려 목종이 안의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가 살아온 용인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용인을 관향으로 하는 용인이씨의 창성은 이길권이 용구에 계적한데서 유래되며 그 후 현재의 용인이라는 지명이 구성, 용구, 용인 등으로 변천됨에 따라 구성이씨, 용구이씨, 용인이씨로 불렸으나 이는 관향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길원은 조정에서 충성을 다하고 고향 용인으로 내려와 후생을 위해 지내다가 105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렸다고 전한다. 묘는 기흥구 영덕동 자은교촌(속칭 잔다리) 마을 뒷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실전해 세장지지 입구에 용인이씨 시조 발상지비가 대신하고 있다.
그후 13세 이광시까지 고려조에서 대를 이어 명문으로 명성을 떨친 명문가며, 조선조에 이르러 충효와 명가로 꽃을 피웠다.
용인이씨 가문의 성세는 13세 이광시 이후 고려말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알려진 구성부원군 이중인(용인이씨 중시조)을 잇는 가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불사이군의 아버지 유훈에 따라 삼대불사한 큰아들 형부전서 이사영과 둘째 아들 개성유후 이사위가 있으며, 이사영의 장손인 지영천군사 이백찬, 이사위 손자 이백지 등이 그들이다.
조선에서 3대까지 벼슬을 하지 말라는 삼대불사 유언대로 그의 맏아들 이사영, 이백찬 부자까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조자손의 3대불사의 충절을 지킨 명문가다. 이들은 2007년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 내에 건립된 ‘고려대전’에 고려의 역대왕 34위와 고려조 충신으로 용인이씨 3대 위패가 봉안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