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의세설 문인의 붓글씨를 본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영광이 아닐 수 없다. 1 붓글씨는 처음과 끝이 일목요연은 하되 결코 획일적이어서는 안 되고 각 자마다 획순에 변화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같은 글이 겹칠 때는 어떤 형태로든 앞 글자와 다른 맛을 느끼게 써야한다. 우암의 고제 호남팔현 권상하가 조선육창의 맏형 창흡이 적소에서 죽자 그의 아들이 묘비명을 다 써와서 우암에게 수결(싸인)만 해 달라하니 때는 우암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던 중 이다. 우암 왈, 선비가 죽었거늘 어찌 가벼이 쓸 수 있겠는가라며 사약을 받던 것을 미루고 창흡의 묘비명을 써주었는데, 이것이 우암이 생전에 쓴 600여 편의 묘비명 중 백미로 꼽힌다. 이를 지켜보던 권상하가 우암의 손자 석주에게 했다는 말이라 전 한다.(이때 먹을 간 사람은 손자 석주라 한다.) 붓글씨는 크게 산 글과 죽은 글로 나눌 뿐 잘 쓰고 못쓰고를 논함은 군자가 할 짓이 못 된다. 권문세도가 종학(宗學)에서 나온 말이다. 그 권문세도가 문중 후학 중에 당대 1인자 서예가가 있는데 학교 문턱에도 안 가본 유학자 권우다. 권우는 일생에 한번 노년에 이르러 조선전통필법을 강의한적 있다. 그는 유학자답게 붓글씨도 률(律)로 쓴
우농의 세설 이제는 만나야한다. 중국 남송이 멸망한 1279년쯤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에 걸쳐 활동했던 증선지(曾先之)는 기존의 18종의 역사서를 저본으로 종합 역사서인 사략을 편찬하는데 이를 고금역대 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이라한다. 사략에는 수많은 고사가 나오는데 중구난방(衆口難防)도 그중하나다. 새김을 하면 대중의 소리는 막기가 어렵다 쯤 된다. 주(周)나라 제10대 려왕(勵王)은 폭군이다. 불평분자는 사찰했고 비방하는 자는 색출해서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 가가호호 조를 짜서 선동자를 밀고하면 포상을 했다. 백성들은 두려워 입도 뻥긋 못했다. 참고로 가화위국(家化爲國-가정을 바꿔 나라 되게 함)의 북한독재자 김일성 통치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사마천 사기 주 본기는 폭군 려왕의 일화를 기록한다. 려왕이 말한다. 보시오. 나를 비방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지 않소. 어떻소. 내 정치솜씨가. 하며 우쭐해하자 소공(召公)은 기 막혀하며 이는 도로측목(道路側目-길가다 만나도 처벌이 두려워 눈짓으로 의사를 표함. 三國志魏志)일 뿐이라며,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을 막으면 언젠가는 무너져 다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
우농의 세설 논어가 당신의 생각을 묻는다. 공자(孔子)는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구간에 불이 났던 사실을 알고 사람이 다쳤는가? 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廐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이는 논어향당편(論語 鄕黨篇)에 나오는 말로, 사람을 귀히 여긴 공자의 인품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불문마는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사람이 더 귀함을 비유하는 말로 회자된다. 하지만 백호윤휴의 생각은 달랐다. 한문은 특이하게도 구두점과 방점의 위치에 따라서 해석과 새김이 전혀 달라진다. 상인호불. 문마(傷人乎不/ 問馬).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가 물어본 뒤에 말에 대해 물었다가 윤휴의 해석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해도 말보다 사람의 안위를 우선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 경전의 전통적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던 교조적 사대부 사회에서는 이런 해석을 용납지 않는다. 우암과 진외가를 한집으로 둔 깨벅쟁이 친구 윤휴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 이유이기도 하다. 백호윤휴는 논어에 관한한 방점 문장의 끝점과 구두점 문장의 쉼표에 관해서는 당대 1인자였다. 어려서부터 골계(滑稽)학습 구두점이나 방점없는 책으로 공부하는데 고
1597년 1월 겨울.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유키나가)과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이)은 싸워서 마치 수뇌부에 권력다툼이 있는 것처럼 한다. 이틈에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그들을 물리치라 한다. 무경칠서를 토씨하나 안 빼고 다 외우는 그가 조호이산(調虎移山)의 간계를 모를 리 없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명을 작전상 거역한다. 조정에서는 왕명 불복종 죄로 이순신을 참수하라며 1597년2월26일 포박한 채 한양으로 압송, 3월5일 의금부에 투옥한다. 죽음에 준하는 고문으로 죽이려 했다. 조호이산이란 관자(管子)의 형세해(形勢解)에 나오는데 호랑이는 산속에 있어야 위엄이 있고, 군주도 자신의 용상에 있어야 위엄이 있다. 그러나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오면 그 위엄은 사라지고 오히려 잡히기 쉽다. 공전계(攻戰計)는 이를 모든 상황이 적에게 불리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위험에서 벗어난다.(待天以困之 用人以誘之 王蹇來返. 三十六計. 十五計攻戰計)고 해석한다. 이 말은 포박자에 나오는 말인데 루항의 어로 의역하면 호랑이를 개집에 넣으면 개만도 못해진다는 말이다. 이때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欺罔朝廷無君之罪)와 적을 치지 않고 국가를
한 초부(樵夫나무꾼)가 있었다. 가문은 한미했고 삼세이전의 선 망부독자다. 춘추공량전(春秋穀梁傳)의 글처럼 아버지가 없으니 스승을 찾지 못했고, 스승을 찾지 못했으니 글을 배우지 못했고, 셈 또한 알리가 만무했다. 저자에서는 그를 일자무식이라 불렀다. 땔감을 장에 팔아 받은 돈으로 곡식을 바꿔 어머니를 봉양한다. 참으로 효자다. 어머니는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같은 말은 한다. 주고, 지고, 놓고 살아 갖지 말고 남에게 주고, 이기지 말고 남에게 지고, 욕심 부리지 말고 놓고 살란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이 또 있으랴. 하늘은 효자를 외면하지 않는 법. 탁발 나온 승려가 주막문전에서 금강경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를 외자 마침 주막에다 장작을 팔고 나오던 그가 듣는 순간 깨달아 출가를 결심 한다. 이른바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돌아와 어머니께 하직 인사올리고 호북성 풍무(湖北城 馮茂) 동산사(東山寺)에 머물던 호북성 황매(黃梅)현 출신 5조(祖) 홍인(弘忍) 601-674에게 출가한다. 홍인문하엔 일천 명이 넘는 문도가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자리에서 홍인화상 왈,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 가능하다. 죽음이 의미가 있으려면 살아있는 날수에 대한 치열한 진정성이 묻어나야한다. 근자에 와서 뜸금 없는 한 사내의 부고(訃告)를 듣는다. 기독교 정통교단에서 이단아로 통하는 구원파 창업주의 사위이자 현 구원파의 실질적 교주 유 아무개의 죽음이 그것이다. 인고유일사(人固有一死)-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홍중우태산(或重于泰山)-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 홍경우홍모(或輕于鴻毛)-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용소추이야(用所趨異也)-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오대양 사건이후 두 번째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 앞 바다 팽목항 세월호 침몰 사건이 시발이다. 현상금까지 내걸고 잡으려했지만 소문만 무성 할 뿐 잡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이젠 죽었다 라며 국립 과학수사연구소가 DNA분석까지 마쳤다는 소식이 뉴스로 떴다. 고래(古來)로 천금의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 법(千金之子不死於市)인데 죽었다하니 어안이 벙벙하긴 하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가 부활 했다는 소식을 듣지 않길 바랄뿐이다. 왜냐면 옛말에 지게지고 벌면 갓 쓰고 먹더라고, 지게지고 버는 사람들은 삶이 고되
동양의 사유나 도덕론에서 가장 오래된 단 하나의 글자로 된 진리를 꼽으라면 단연 예(禮)일 것이다. 예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반듯하게 잡아주는 벼리다. 이 벼리는 남에게 무례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날 선 정직함으로 분노하며 살기보다는 예로서 날선 정직함의 분노를 무디게 하라면 비겁일까. 12세 때 논어를 읽은 퇴계는 훗날 자신의 손자를 엄히 꾸짖는 편지 한 통을 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친다하여 이를 격대(隔對)교육이라 하는데 들은 게 많은 손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른의 말씀에 빠지지 않고 도전적으로 답변을 한다. 그것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 해도 무례인데 하물며 어른 말씀에 끼어드는 것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너는 여러 어른들 앞에서는 조급함을 버리고 조용히 말해야한다. 어른들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들어 두었다가 나중에 생각을 해보고 자세히 살펴서 그 중 이치에 가까운 어른의 의견을 따라서 유익함을 얻는 것이 옳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설픈 지식으로 너의 생각을 지나치게 주장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하고 소리를 높여 떠들면서 여러 어른들의 말을 앞질러서 하는구나. 가령 너의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선비가 가난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선비는 아웃이다. 지식인을 선비라 칭함은 시대에 대한 발언 때문이다. 옛 선비는 두 가지에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명운을 건다. 상소문을 몇 룹 올렸는가, 적소 귀양을 어느 곳에 두었는가이다. 첫 번째는 차자 간단한 상소로, 두 번째는 상소문으로 올리는데 차자는 진언 禮로 간함으로 하고, 상소문은 직언 쓴 소리로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세 번째 상소문인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한다. 내말이 틀렸다면 이 도끼로 내목을 자르시오라는 엄중문책을 내함 한다. 선비가 임금을 꾸짖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가진 게 많은 선비일수록 상소문의 붓끝은 무뎌 진다. 선비가 목숨을 내 놓고 상소문을 쓸 수 있는 힘은 천작이라는 하늘이 준 벼슬 때문이다. 맹자 고자장구 상에서 맹자 왈 천작은 하늘이 내리는 벼슬이고, 인작은 사람이 주는 벼슬인데 천작이란 인 의 충 신에 최선을 다함에 즐거워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음이다.(孟子曰 有天爵者 有人爵者 仁義忠信 樂善不倦此天爵也) 선비란 아래로 백성들에게는 인과 의로 하고 위로 임금에게는 충과 신으로 섬기는 것을 하늘이준 벼슬로 여기는 거다. 누항의 백성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선시대 임금 중종과 군신지예(君臣之禮)를 갖추지 않고 술을 마신 선비는 아호를 자암으로 쓰고 자를 대유(大柔)로 쓰는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가 유일했다. 왕희지 서체를 토대로 한 독특한 서체를 체계화 했는데 사숙으로 당초사대가(唐初四大家)의 서법을 모두 섭렵한다. 이들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운 자들로 구양순의 엄정함, 우세남의 온화함, 저수량의 곱디고움, 유공권의 자연스러움을 발췌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서체를 그가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인수체(仁壽體)라고 한다. 조선 최고의 명필을 꼽으라면 자암을 비껴 갈순 없다. 물론 혹자는 조선4대 명필운운하며 조맹부 서체에 대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진(晉)서체를 저본으로 해서 행서 초서의 대가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왕희지와 안진경 서법을 모두 통달한 신필(神筆) 석봉(石峯) 한진(韓濩) 등과 같은 반열에 놓지만 이는 자암에 대한 무례다. 자암의 글씨는 훗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유수체(流水體)로 승화됐고, 창암의 유수체는 후일 소암의 서체와 듕섭(이중섭)의 그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근자에 와서 자암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일이 많아
관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제나라 환공(桓公)을도와 천하의 패자(覇者)로 이끈 불세출의 인물이다. 더군다나 비주류에서 주류로 진입한 입지전적의 인물임에도 공자는 관중은 그릇은 작다(子曰管仲之器小哉. 論語八佾篇 22文章)며 평가 절하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입신양명의 길에 들어서려면 아버지로부터 주나라의 문과 예를 배워 천하 군들에게 유세하는 가부장제 교육이 주류였다. 이에 반해 공자는 편모슬하에서 한곳에 정착하는 모계 중심의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성장과정 탓에 관중을 보는 시각이 뒤틀릴 수밖에 없다. 혹자 왈, 관중은 검소합니까 공자 답, 관중은 집을 세 군데나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검소할 수 있겠는가 또 혹자 왈, 관중은 예를 압니까 혹자 답, 임금이 가림 벽을 세우자 관중도 가림 벽을 세웠고. 임금이 두 나라 임금사이의 우호 증진을 위하여 술잔을 엎어놓는 잔대를 설치하자 관중도 잔대를 설치했다. 이러한 관중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랴할 정도로 관중에 대해 가학적이었다. 물론 관중의 업적에 대하여 칭찬을 하기도 한다. 주례복귀(周禮復歸)를 주장하는 공자의 입장에서는 제후의 신하에 불과한 관중의 분수를 넘는 사치가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생존하고 있는 사이비. 이단에 관련된 교주들의 한결같은 공통된 특징은 뼛속까지 자본주의자다. 이들은 신도들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 위하여 밤낮으로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헌신으로 애를 쓴다. 신도들의 불안 심리를 절묘하게 극대화 한 후 이를 컨트롤해서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만든다. 더 기막힌 사실은 교주는 자신을 절대로 신격화하지 않는다. 다만 신도들이 교주를 신으로 모시도록 조직화 할 뿐이다. 신도들은 서로 앞 다투어 교주를 섬기고 손바닥이 찢어질 정도로 손뼉 치며 목이 터져라 찬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믿음이 혹시라도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잊으려한다. 이쯤 되면 교주는 가끔이지만 비밀의 말씀이라 하여 천당에 관한 설교를 슬쩍 흘린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 죽으면 천당 갈 텐데 이 땅에서 그깟 돈이 뭐에 필요하냐라고 하면서 덧붙이기를 하나님께서 너에게 돈을 벌게 한 이유는 돈 벌어서 처자식 먹여 살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네 죄를 사할 수 있도록 물질로 봉사하라고 하나님께서 네게 돈을 벌게 한 것이라며 도덕적 의무론까지 들먹이며 가슴을 쿵하고 울린다. 심신이 허약한 신도들은 마치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혼자 아는 양 가슴에 뿌듯함
퇴계 이황을 사숙한 조선의 선비 제암(霽巖)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 저본으로 불후의 명저(名著)를 지은 것이「인심흑백도(人心黑白圖)」다. 이는 사람을 성인군자,똑똑이,헛똑똑이 평범인으로 구분한다. 성인은 저절로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요, 군자는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學而知之)요, 똑똑이는 노력해서 부끄럼이 몸에 이르지 않는 곤이지지(困而知之)요, 헛똑똑이는 시험 잘 봐서 간판만 그럴싸한 곤이불학(困而不學)요, 범부는 결심은 하지만 매번 못 지키는 생활 교이불선(敎而不善)이라고 갈파했다. 이에 공자는 생이지지와 범부인 교이불선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세 가지의 삶을 강조한다. 첫째, 믿음을 돈독히 하고 세상이치배우기를 좋아할 것이며(독신호학篤信好學). 둘째,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잃지 않을 것이며(수사선도守死善道). 셋째, 이웃을 위해 몸을 죽여 인을 이뤄야 한다(살신성인殺身成仁). 인은 딱 둘이다. 위를 사랑하는 양지양능(良志良能)의 치사랑과 내리사랑이다. 치사랑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요. 내리사랑은 자식을 사랑하는거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 중심에 박근혜 대통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위로는 양지양능 할 부모가 아니 계시고,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