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옛날에는 힘세고 싸움만 잘하면 당장 왕 노릇을 할 수는 있다. 나중에 산수갑산을 갈망정. 국민이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자유민주국가에서는 힘세고 싸움만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된다. 이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던가.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라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빚을 얻거나 내 주머니 털어서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라고. 물론 도깨비 방망이가 아닌 것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능력을 보여야 한다”가 아니라면 애당초 대통령 출마는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다. 대통령선거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상대 후보가 나보다 잘나서? 아니다. 잘났다고 밥먹을 때 숟가락 두 개 들고 먹지는 않을 터. 똑똑하다고 신발 두 켤레 껴신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는가.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어서다.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백성의 마음을 잃어서다. 그런데 맹자는 왜 백성의 마음을 잃었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 북송 때 경학가 육전의 말
[용인신문] 위나라 대부 거백옥은 평소 공자께서 존경하는 인물이다. 공자는 일생에 위나라를 세 번 갔는데 그중 두 번은 거백옥 집에 몇 년씩 머물 정도로 거백옥도 공자도 서로를 아끼고 존숭함이 지극했다. 하루는 거백옥이 집에 일하는 사인을 보내와 공자께 촌지와 인정을 드리니 사연은 이랬다. 공자가 철환주유를 마치고 돌아오니 노나라 군주 애공이 위로연을 배풀었다. 그의 나이 68세때 일이다. 아들 리를 낳은 3년 후 휴처休妻한 그의 아내는 그보다 1년 전 아들을 낳은지 48년 후 공자 나이 67세 때 사망하고, 2년 뒤 69세 때는 아들 리가 죽는다. 이에 위로할 겸 겸사하여 사인을 보낸 것이다. 공자께서도 그 답례로 대부 거백옥께서는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 라고 묻는다. 이에 사인이 답한다. 저희 대부님께서는 작은 잘못이라도 범하지 않으시려고 무진 애를 쓰시는 것은 같은데 잘 안되시나 봅니다. 공자께서 거백옥보다 40년 아래니까 거백옥의 나이는 대략 100세를 족히 넘었으리라. 칠 십세를 일러 종심소욕 불유구라했다. 뭘 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을 나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100세가 넘은 나이의 사람이 허물이 있은들 얼마나 있으랴마는 아직도 혹시라도 있을
[용인신문] 성인 공자를 따르는 학풍인 유가의 기본 덕목은 '수기치인'이다. 나를 닦음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이해되는 말이다. 수기치인은 '인의예지'로 공부되어 지고, 이는 네 개의 구체적인 실천 생활을 강제한다. 인은 ‘측은지심’이며, 의는 ‘수오지심’이며, 예는 ‘사양지심’이며, 지는 ‘시비지심’이다. 곧 일상생활에서 지녀야 하는 측은함과 부끄러움과 사양함과 시비구분의 마음이다. 구도장원공이라 불리는 율곡 이모께서는 격몽요결 서문 초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쉽게 말해서 그때를 살다 가신 우리 선조들의 공부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것을 본받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공부가 본받음보다는 지식을 쌓는게 중점이지만, "어디서 뭘 하든지 곧고 바르게 살거라."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다. 바르게 산다는 게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던가? 아니다. 그냥 곧고 바르게 살면 되는 거다. 내가 먼저 조금 먹고
[용인신문] 사람은 누구를 무론 하고 자신의 무지가 한계로 드러나는 직위까지 이르면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꽤나 불편을 넘어 위험할 수 있다. 그 이른다는 직위가 대통령이라는 직위이고, 또 그 누군가라는 대상이 국민일 때 이보다 고약할 수 없으리라. 대한민국 땅에서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곧 “나는 대통령 퇴임 후 감옥 갈 준비가 됐다.”라는 말로 읽히기도 한다. 그만큼 역대 대통령이 퇴임 후 영어의 몸이 된 경우가 흔해서이다. 여기에 대한 세상의 입방아는 청와대가 터가 좋지 않아서라는 쪽으로 분분하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지 아직도 이런 눈멀고 귀 막았던 깜깜이 시대에서나 먹혔던 그런 말들이 이리도 밝은 시대에 유효한 걸 보면 귀신장사는 망하는 법이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공자는 말한다.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다. 옛말에 바르게 산다면 저승사자가 문턱까지 온다 해도 두려울 게 없다는데, 이는 곧 그 사람의 성품의 문제인 것이지 터의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엔 너무 그렇지 않은가. 사실 청와대는 국민을 향한 봉사의 자리이다. 그런데도 고약하게도 청와대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권력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권력에는 한가지 금
[용인신문] 논어에는 공자의 회한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노년에 소회를 밝혔다. 전하는 자술서가 그것이다. 논어 위정편 2-4문장에 그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으며, 서른에는 홀로 섰으며,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쉰에는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았으며, 예순에는 누가 뭐라 함에 순하게 넘길 수가 있었으며,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들 크게 어긋남이 없더라. 열다섯이라는 상수를 빼고 나면 나머지는 30세부터 70세에 이르도록 10년으로 묶어 정수로 밝히고 있다. 이른바 공자 인생 10년의 법칙을 말하고 있는 거다. 공자는 서른 살 되면 이립이라하여 서라 명한다. 선다는 말은 논어 계씨편 16-13문장에서 답을 찾는다. 아버지 공자는 아들 리에게 말한다. 예를 배웠느냐, 예를 배우지 않으면 바르게 설 수가 없다. 그러자 아들은 물러나 “예를 배웠다”고 기록한다. 이와 같은 말을 공자는 논어 마지막 책 요 왈 편 20-3문장에서 또 말하고 있다. 예를 모르면 바르게 설 수가 없다. 공자가 죽은 후에 어느 날 쯤인가 하는 날에 나라를 쥐락펴락한다는 위나라 왕손이자 대부인 공손조가 묻는다. “생전의
[용인신문] 천자가 도가 있으면 백성은 그를 떠받들지만 천자가 무도하면 백성은 그 천자를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라 했다. 정관정요 論정체편1-2에서 정관 6년 당 태종이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본래 이 말은 시경에 출전한다. 동서고금 어느 군주를 무론하고 민심의 역린을 건들고 살아남은 이는 없다. 흔히 아는 말로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서경 주서 채중지명편에 나오는 민심무상에서 따온 말이다. 요즘엔 여론이라는 말로 불리지만 여론輿論이라는게 다른 게 아니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레에 얹을 수 있는 만큼의 아무 힘도 없을 것 같은 백성들의 말의 양이다. 맹자는 이루장구상편에서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한 군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순자 책 왕제편과 공자가어 오의해편에는 공자는 노나라 애공과의 대화에서 이를 물과 배로 비유한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워 나아가게도 하지만 반대로 배를 뒤집어 엎기도한다. 본래 군주란 백성들보다 너무 앞서나가면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렇다고 백성들하고 같이 가면 같이 망한다. 눈높이는 같이하되 백성들보다는 한 뼘 조금 못 될 정도 쯤은 앞서야 한다. 영천세
[용인신문] 일찍 관리 생활을 했던 장자는 정해진 대로 움직여 줘야 하는 그런 사회가 체질에 맞지 않았던 탓인지 관리를 그만두고 그야말로 무위를 추구하는 천둥벌거숭이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뜻과는 달리 사는 것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 끼니를 빌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견디다 못한 장자는 현달 한 벗 감하후監河候를 찾아가 끼니를 빌고자 하니 벗이 말한다. 조금만 참게 곧 세금 걷는 철이 되니 그때 세금을 거둬서 원하는 만큼 이상으로 돈을 마련해줌세. 그러자 장자는 말한다. 지금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나중에 큰돈이 들어온들 뭔 이득이 있으랴며 우화 한 토막을 들려준다. 길을 걷는데 수레바퀴 자국에 움푹 팬 구덩이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어 청하길,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한 바가지만 도움을 달라 한다. 그러자 “내가 마침 물이 넘쳐나는 남쪽 나라로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을 잔뜩 떠다가 주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물고기는 분기탱천해서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은 단 한 바가지의 물이야. 먼 훗날 천하의 물을 다 가져다준들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라고. 군자의 말 중에 ‘부덕의 소치’라는 말이 있다. 듣기에 따라서 뜬구름 잡는 소리
[용인신문] 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는 진딧물부터 하루살이 벌레들이 많아 앉아서 쉴만한 장소는 못된다. 그럼에도 그 나무 아래는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다. 단맛나는 과일 때문이다. 덕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다. 권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히 사람들이 모인다. 거기에는 덕이라는 단맛을 나눠줄 수 있어서다. 옛 백성들은 훌륭한 군주의 조건으로 덕을 꼽는다. 덕이란 백성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주는 행위라 한다. “군주가 훌륭한지 아닌지, 저잣거리의 일반 백성들이 어찌 알랴.”하고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는 군주가 더러 있기도 하나 백성들은 어느 군주가 경제적 이득을 줄 군주인지 아닌지 분명히 안다. 그 군주를 모르겠거든 그가 쓰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라 했다. 주역 중지곤괘 제1효에 나오는 말로, 가을 서리가 밟히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닥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군주가 어떤 사람을 들어쓰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풍성한 가을이 오느냐, 아니면 춥고 배고픈 빙하기가 오느냐를 가늠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목수라도 나무를 켤 때는 먹줄을 따르는 법이다. 이는 곧 행정경험을 말한다. 행정경험이 풍부한 군주가 나와서 백성들의 삶에 질을
[용인신문] 조선에는 3대 암군이 있다. 서자 출신 방계 임에도 16세에 권좌에 오른 선조는 1608년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5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재위 기간으로만 친다면 장장 41년이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결딴낸 인물이기도 하다. 아홉 단으로 쌓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손은 뒤로 묶고,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짊어지는 함벽여친銜璧輿櫬의 예와 한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찧어 피를 내기를 세 번씩 모두 아홉 번을 해야 한다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욕을 당한 인조. 1790년 명군 정조가 서른아홉 나이에 수빈 박 씨에게서 득남하는데 그 아들이 훗날 승어부를 못한 조선왕조 멸망의 문을 연 임금 순조다. 나라를 망쳤음에도 백성 누구도 그런 임금을 탄핵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어두웠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되는 데는 백성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임금을 먹여 살리는 것은 백성들인데 백성에게는 세금 낼 의무와 부역의 책임만 있고, 권리는 없던 셈이다. 어리숙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어두운 시대임이 분명했다. 그나마 지금은 세상이 조금은 밝아져 최소한 나라를
[용인신문] 맹자가 살던 시대에 현자가 셋 있었으니, 그 중 양주는 “내 몸에서 한 호리의 털을 뽑아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고, 묵자는 “내 머리 꼭대기 정수리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막은 “양주도 묵적도 다 틀렸다”며 그 중간을 잡은 인물이다. 맹자는 이 세 현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양주는 인仁을 해치는 자요, 묵자는 의義를 해치는 자며, 자막은 시중時中을 해치는 자이니, 이 모두는 하나를 들어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 맹자는 “훌륭한 임금이 나오질 않아 제후들은 방자해졌으며 처사들은 멋대로 정치를 했고,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를 휩쓸었다. 천하의 말 중엔 양주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묵적에게 귀의한다”고 말했다. 양주나 묵적이나 자막 이들은 개인적으로 볼 땐 나름 훌륭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맹자는 굳이 조목조목 예를 들어 이들은 훌륭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있고, 군주를 가르치는 현자가 있는 것이다. 공자가 쓴 춘추
[용인신문]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주나라를 중심으로 제후국이 있는데 주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왕이라는 호칭을 쓸 수가 없다. 이에 주나라 왕은 제후국 군주들에게 작위를 주는데 나라의 도덕적 역량 및 벼리의 조건을 따져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이렇게 다섯 개의 작위를 구분해서 내려준다. 공자의 나라인 노魯나라는 첫 번째 서열인 공公이 아닌 두 번째 서열 후侯라는 작위를 받는데 공자는 춘추경을 기록하면서 후侯의 지위에 있는 魯나라를 공公의 지위로 올려 군주의 명칭을 장공, 희공, 소공, 애공, 이런식으로 기록한다. 이는 魯나라만이 역사 기록의 중심이라는 공자만이 할 수 있는 필삭筆削인 셈이다. 여기서 노나라 국정의 독특한 면이 있는데 군주와 신하로서의 국정운영이 아닌 여러 명의 대부와 읍재들이 각 지역을 나눠 맡아서 노나라 국정에 함께한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이 있고, 각 당의 당수가 있는 거와 비슷한 이치이다. 여기다가 노나라에는 종속한 부용附庸국이 있다. 주루邾婁나라와 또 속국 주루邾婁 속나라가 그런류의 나라들이다. 문제는 각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들이나 혹은 부용국 또는 속국 중에서 백성을 잘 먹여살리지 못하는 대부라든가 읍
[용인신문]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장땡”이라는 말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뒤틀린 결과 우월론이다. 이왕 갈 서울이라면 바로 갈 것이지 왜 하필 모로가야 겠는가. 물론 거기에는 나름의 고충은 있으랴. 다수가 그렇게 한다 해도 그렇게 해선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치인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치국과 평천하에 앞서 수신과 제가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선은 나를 돌아보고 내가 무흠한가 그렇다면 가족을 돌아봐야 한다. 여기에서도 누군가에게 책잡힐 일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치인治人길로 들어서도 된다. 나와 내 가족은 의혹 투성이 인데 남을 다스리겠다고 한다? 그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출마자야 당선만 되면 그만일지 몰라도, 이쯤 되면 국가의 부끄러움이요, 국민의 수치다. 국가라는 거대의 집단을 책임지고, 국민을 이끌어가야 하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는 거기에 걸맞는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공약이랍시고, ‘던지기’ 식으로 뱉어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경박한 일은 없으리라.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 왕과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천하를 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