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공자의 손자 자사가 썼다고 전하는 중용 책1-4문장에 ‘천하지대본’이라는 경구가 있다. 주자의 집주에 따르면 편벽되고 치우침이 없음에서 천하의 대본은 비롯된다 한다. 이러한 천하대본을 농자에 비유한 인물이 있으니 을파소가 말했다 전하는 ‘농자천하지대본’이 그것이다. 요즘 세상에서야 농사일이 천하의 대본까지야 하겠냐마는 농사일이 천하의 대본인 까닭은 아마도 생명의 연장이 예서 비롯됨일 것이다. 농사가 없었다면 생명도 없다는 일견 이해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관자 목민편은 좀 더 쉽게 풀어써서 백성의 안일은 곳간이 가득 참에서 시작된다 했다. 천자문에서는 이를 ‘치본어농’이라 한다. 다스림은 농사로써 그 바탕을 삼는다는 말이다. 곧 정치란 두루뭉술하게는 백성을 배고프지 않으며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요, 콕 짚어서는 백성 개개인을 풍족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개인을 일러 맹자 이루장구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의 근본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의 근본은 가정에 있으며, 가정의 근본은 백성 개인에게 있다.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배부르게 해줄 역량 있는 목민관을 만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복중에도 천복이라 하겠다. 하루는 요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용인신문] 논어 헌문편 14-36문장에서 보면 하루는 어설프게 글줄깨나 읽었다는 혹자가 자신이 마치 도량이 큰 현자라도 되는 양 공자께 거들먹거리며 묻는다. “죄지은 자를 은혜로서 갚아준다면 더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그자를 빤히 보며 이렇게 답한다. “죄지은 자는 법으로 갚고, 은혜를 끼친 자는 은혜로 갚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은혜란 덕이 생활 속에서 실천으로 드러남이요, 옛사람이 말하는 덕이란 백성들에게 재물이나 피륙 곡물 등의 실질적 도움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호안국의 셋째아들 호상학파의 태산북두인 호굉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덕 있는 자가 부귀하면 그 부귀로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덕이 없는 자가 부귀하면 그 부귀로 제 몸을 망친다.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죄는 지은대로 가고 덕은 쌓은 대로 가는 것이다. 이건 누가 옆에서 빌며 고사 지내지 않는다고 해도 하늘의 이치가 그렇다. 옛날 이언에 백성을 돌아보지 않는 임금이라는 말이다. 임금님의 목적은 하나다. 나라 안 백성을 돌아보아 행여라도 굶지는 않는지 찬비 맞아 추위에 떨고 있지는 않은지 늘 귀를 백성에게 기울이고, 백성을 위해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이런 임금은 성
[용인신문] 훌륭한 임금은 백성들보다 위에 있다고 해서 백성들은 그를 무겁다고 여기지 않으며 백성들보다 앞서 있다고 해서 백성들은 그를 앞에서 걸리적거린다고 여기지 않는다 했다. 또 훌륭한 임금은 백성들보다 먼저 부하지 아니하며 백성들보다 먼저 배부르지 아니하며 백성들보다 먼저 쉼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천하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며 싫어하지 않는다 한다. 호랑이 담배 물던 시대에나 통할 법한 이런 말들이 없어지지 않고 아직까지도 횡횡한다는 것은 그런 나라 백성들은 그동안 결코 훌륭한 임금을 갖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농사 잘되기는 하늘 잘 만날 탓이고, 옷 잘 입기는 아내 잘 만날 탓이고, 돈 잘 쓰기는 부모 잘 만날 탓이라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백성의 복은 뭐니 뭐니해도 훌륭한 임금을 만나는 게 복이라면 복일 것이다. 옛날 고리짝 시절에 격양가라는 게 있다. 백성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임금의 덕이 도대체 나에게 뭔 소용이냐며 땅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의 호시절이다. 요즘에는 격양가는 고사하고 사방천지에서 사는 게 고달프다며 악악 소리가 충만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가. 답은 간단하다. 모르면서
[용인신문] 논어 자장편 19-5문장을 풀어 쓰면 ‘날마다 알지 못한 것을 공부하고, 달마다 공부한 것을 잊지 않는다면 가히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정도로 말할 수 있다. 7세부터 논어를 읽기 시작해 9세에 이르러 공부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청나라 초기 삼대학자 중 한 사람이라 불리는 고염무. 그는 어려서부터 논어를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별지에 수기해 두었다가 약관의 나이를 지나 별지수기문장을 읽던 중 위의 문장 자하의 말에서 크게 깨달은 바를 얻어 ‘매일 아는 것을 기록하노라’ 라는 의미의 ‘일지록’을 썼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망국과 망천하도 이에 속한다. 이를 요즘 말로 풀어쓴다면 망국은 왕조가 말하는 것이고, 망천하는 도덕이 무너지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국가흥망 필부유책이라는 말이다. 물론 원문에는 보천하자 필부천여유책이라 기록됐지만. 이쯤에 주목해야 할 대목은 망천하의 단초가 된다는 ‘도덕’이라는 두글자다. 별 효용도 없을 것 같은 그야말로 도덕 나부랭이가 망천하의 단초가 됨을 옛사람은 무슨 배짱으로 말했던 걸까. 고래로 치인을 하고 치자가 되고자하는 자의 필수 제일 덕목은 도덕이다. 도덕은 의혹 없음에서 출발한다. 우선
[용인신문] 성인성(聖)자를 파자하면 아홉째 천간임(壬)을 아래인 하기(下基)에 놓고, 위쪽으로 좌양(左陽)에는 귀이(耳)가 있고, 또 위쪽으로 우음(右陰)에는 입구(口)를 두나니 글자로 풀어 말한다면 성인은 북쪽을 등지고 앉아서 천하의 소리를 먼저 듣고 백성이 사는 남면을 향하여 들은 소리를 백성이 알아듣게 말해주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백성을 힘들게 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주역 설괘전에는 이를 “성인은 천하의 소리를 들어 남쪽의 백성을 다스리되 밝음을 향하여 다스린다.”고 했다. 그래서 성스러운 사람이 임금이 되면 백성을 이쪽으로 치우치거나 저쪽으로 치우치는 양끝, 곧 극단으로 모는 일이 없으며 백성으로 하여금 이쪽 끝도 저쪽 끝도 아닌 늘 가운데에서 안정되이 평안하게 살게 한다고 했다. 중용에서 이렇게 백성을 다스린 임금을 말했는데 순임금이 그다. “순임금님은 양 끝을 잡았으며 가운데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사용하도록 하셨다.”라고 기록한다. 시경 주송 재삼편에 성군의 기록이 한토막 있는데 “어진 임금은 백성의 밭에 난 풀을 베어주며 제멋대로 자라 밭매기가 힘들어질까 봐 밭에 자란 몹쓸 나무들을 뽑아주나니 백성들은 밭을 갈기가
[용인신문] 공자의 가르침은 대체로 하나로 요약된다. 배워서 벼슬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닦아 남을 다스릴 것인가.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바름이 그것이다. 누구를 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흠이 없어야 하고 책잡힐 일도 없어야 하고 의혹 같은 것들과는 아예 상종도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매는 일도 삼가했으며 길 가다가 신발이 벗겨져도 그곳이 외밭이라며 벗겨진 신을 버려두고 갈망정 외밭에서 신 끈을 고쳐매는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바름에 대해 자신을 ‘앗 뜨거’워 할 정도로 검속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왈, 그렇게 따지기 시작한다면야 주머니 털어 먼지 안날 자 몇이나 되냐며 볼멘소리할 것이다. 잊지 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 중에는 주머니 털어도 먼지 안 나는 사람 의외로 많다. 저들 눈에는 그런 사람이 안 보일 뿐이지. 웅덩이에 오래 살면 그곳이 집인 줄 안다. 기독교 경전 누가복음 6장 39절쯤을 읽어가다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토를 단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의 이 말은 너 자신에 대한 표층이
[용인신문] 철환주유중 공자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액을 당해 일주일 조금 넘게 음식을 먹지 못해 아사직전에 이른 경우가 있었다. 공자의 재정을 맡아보던 자공이 비상금을 털어 자로로 하여금 쌀을 구해오니 안회가 밥을 짓는데 뜸을 들이던 중 상태를 보고자하여 뚜껑을 여니 김이 훅 올라와 천장에 붙은 끄름이 떨어진다. 당황한 안회는 밥주걱으로 끄름 닿은 부분을 퍼내어 끄름만을 떼어내고 밥주걱에 붙은 나머지 부분을 먹으니 멀리서 밥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자공이 이를 보고는 안회가 먼저 밥을 훔쳐먹는다 생각하고는 괘씸히 여겨 스승 공자께 따지듯 묻는다. 평소 공자는 안회를 절개가 굳은 청렴한 제자라 칭찬했던 탓이다. 자공 왈 “어질고 청렴한 선비도 배고프면 절개를 바꿉니까?” 공자는 답한다. “그 정도라면 어진 것도 아니고 청렴은 커녕 선비도 아니지” 자공이 또 묻는다. “그렇다면 안회 같은 사람은 배고프다고 해서 절개를 바꿀까요?” 이에 공자는 말한다. “안회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자공은 좀전에 본 안회가 밥 훔쳐먹은 일을 말한다. 공자는 그랬다면 거기엔 그만한 일이 있었으리라라며 안회를 불러 에둘러 묻는다. “안회야. 혹시 밥이 다 됐으면
[용인신문] 옛날에는 힘세고 싸움만 잘하면 당장 왕 노릇을 할 수는 있다. 나중에 산수갑산을 갈망정. 국민이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자유민주국가에서는 힘세고 싸움만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된다. 이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던가.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라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빚을 얻거나 내 주머니 털어서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라고. 물론 도깨비 방망이가 아닌 것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능력을 보여야 한다”가 아니라면 애당초 대통령 출마는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다. 대통령선거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상대 후보가 나보다 잘나서? 아니다. 잘났다고 밥먹을 때 숟가락 두 개 들고 먹지는 않을 터. 똑똑하다고 신발 두 켤레 껴신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는가.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어서다.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백성의 마음을 잃어서다. 그런데 맹자는 왜 백성의 마음을 잃었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 북송 때 경학가 육전의 말
[용인신문] 위나라 대부 거백옥은 평소 공자께서 존경하는 인물이다. 공자는 일생에 위나라를 세 번 갔는데 그중 두 번은 거백옥 집에 몇 년씩 머물 정도로 거백옥도 공자도 서로를 아끼고 존숭함이 지극했다. 하루는 거백옥이 집에 일하는 사인을 보내와 공자께 촌지와 인정을 드리니 사연은 이랬다. 공자가 철환주유를 마치고 돌아오니 노나라 군주 애공이 위로연을 배풀었다. 그의 나이 68세때 일이다. 아들 리를 낳은 3년 후 휴처休妻한 그의 아내는 그보다 1년 전 아들을 낳은지 48년 후 공자 나이 67세 때 사망하고, 2년 뒤 69세 때는 아들 리가 죽는다. 이에 위로할 겸 겸사하여 사인을 보낸 것이다. 공자께서도 그 답례로 대부 거백옥께서는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 라고 묻는다. 이에 사인이 답한다. 저희 대부님께서는 작은 잘못이라도 범하지 않으시려고 무진 애를 쓰시는 것은 같은데 잘 안되시나 봅니다. 공자께서 거백옥보다 40년 아래니까 거백옥의 나이는 대략 100세를 족히 넘었으리라. 칠 십세를 일러 종심소욕 불유구라했다. 뭘 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을 나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100세가 넘은 나이의 사람이 허물이 있은들 얼마나 있으랴마는 아직도 혹시라도 있을
[용인신문] 성인 공자를 따르는 학풍인 유가의 기본 덕목은 '수기치인'이다. 나를 닦음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이해되는 말이다. 수기치인은 '인의예지'로 공부되어 지고, 이는 네 개의 구체적인 실천 생활을 강제한다. 인은 ‘측은지심’이며, 의는 ‘수오지심’이며, 예는 ‘사양지심’이며, 지는 ‘시비지심’이다. 곧 일상생활에서 지녀야 하는 측은함과 부끄러움과 사양함과 시비구분의 마음이다. 구도장원공이라 불리는 율곡 이모께서는 격몽요결 서문 초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공부라는 것은 일상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쉽게 말해서 그때를 살다 가신 우리 선조들의 공부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것을 본받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공부가 본받음보다는 지식을 쌓는게 중점이지만, "어디서 뭘 하든지 곧고 바르게 살거라."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다. 바르게 산다는 게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던가? 아니다. 그냥 곧고 바르게 살면 되는 거다. 내가 먼저 조금 먹고
[용인신문] 사람은 누구를 무론 하고 자신의 무지가 한계로 드러나는 직위까지 이르면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꽤나 불편을 넘어 위험할 수 있다. 그 이른다는 직위가 대통령이라는 직위이고, 또 그 누군가라는 대상이 국민일 때 이보다 고약할 수 없으리라. 대한민국 땅에서 대통령을 한다는 것은 곧 “나는 대통령 퇴임 후 감옥 갈 준비가 됐다.”라는 말로 읽히기도 한다. 그만큼 역대 대통령이 퇴임 후 영어의 몸이 된 경우가 흔해서이다. 여기에 대한 세상의 입방아는 청와대가 터가 좋지 않아서라는 쪽으로 분분하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지 아직도 이런 눈멀고 귀 막았던 깜깜이 시대에서나 먹혔던 그런 말들이 이리도 밝은 시대에 유효한 걸 보면 귀신장사는 망하는 법이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공자는 말한다.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다. 옛말에 바르게 산다면 저승사자가 문턱까지 온다 해도 두려울 게 없다는데, 이는 곧 그 사람의 성품의 문제인 것이지 터의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엔 너무 그렇지 않은가. 사실 청와대는 국민을 향한 봉사의 자리이다. 그런데도 고약하게도 청와대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권력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권력에는 한가지 금
[용인신문] 논어에는 공자의 회한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노년에 소회를 밝혔다. 전하는 자술서가 그것이다. 논어 위정편 2-4문장에 그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으며, 서른에는 홀로 섰으며,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쉰에는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았으며, 예순에는 누가 뭐라 함에 순하게 넘길 수가 있었으며,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들 크게 어긋남이 없더라. 열다섯이라는 상수를 빼고 나면 나머지는 30세부터 70세에 이르도록 10년으로 묶어 정수로 밝히고 있다. 이른바 공자 인생 10년의 법칙을 말하고 있는 거다. 공자는 서른 살 되면 이립이라하여 서라 명한다. 선다는 말은 논어 계씨편 16-13문장에서 답을 찾는다. 아버지 공자는 아들 리에게 말한다. 예를 배웠느냐, 예를 배우지 않으면 바르게 설 수가 없다. 그러자 아들은 물러나 “예를 배웠다”고 기록한다. 이와 같은 말을 공자는 논어 마지막 책 요 왈 편 20-3문장에서 또 말하고 있다. 예를 모르면 바르게 설 수가 없다. 공자가 죽은 후에 어느 날 쯤인가 하는 날에 나라를 쥐락펴락한다는 위나라 왕손이자 대부인 공손조가 묻는다. “생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