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천자가 도가 있으면 백성은 그를 떠받들지만 천자가 무도하면 백성은 그 천자를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성이라 했다. 정관정요 論정체편1-2에서 정관 6년 당 태종이 신하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본래 이 말은 시경에 출전한다. 동서고금 어느 군주를 무론하고 민심의 역린을 건들고 살아남은 이는 없다. 흔히 아는 말로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서경 주서 채중지명편에 나오는 민심무상에서 따온 말이다. 요즘엔 여론이라는 말로 불리지만 여론輿論이라는게 다른 게 아니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레에 얹을 수 있는 만큼의 아무 힘도 없을 것 같은 백성들의 말의 양이다. 맹자는 이루장구상편에서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한 군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순자 책 왕제편과 공자가어 오의해편에는 공자는 노나라 애공과의 대화에서 이를 물과 배로 비유한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워 나아가게도 하지만 반대로 배를 뒤집어 엎기도한다. 본래 군주란 백성들보다 너무 앞서나가면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렇다고 백성들하고 같이 가면 같이 망한다. 눈높이는 같이하되 백성들보다는 한 뼘 조금 못 될 정도 쯤은 앞서야 한다. 영천세
[용인신문] 일찍 관리 생활을 했던 장자는 정해진 대로 움직여 줘야 하는 그런 사회가 체질에 맞지 않았던 탓인지 관리를 그만두고 그야말로 무위를 추구하는 천둥벌거숭이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뜻과는 달리 사는 것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 끼니를 빌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견디다 못한 장자는 현달 한 벗 감하후監河候를 찾아가 끼니를 빌고자 하니 벗이 말한다. 조금만 참게 곧 세금 걷는 철이 되니 그때 세금을 거둬서 원하는 만큼 이상으로 돈을 마련해줌세. 그러자 장자는 말한다. 지금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나중에 큰돈이 들어온들 뭔 이득이 있으랴며 우화 한 토막을 들려준다. 길을 걷는데 수레바퀴 자국에 움푹 팬 구덩이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어 청하길, 당장 말라죽을 지경이니 물 한 바가지만 도움을 달라 한다. 그러자 “내가 마침 물이 넘쳐나는 남쪽 나라로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을 잔뜩 떠다가 주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물고기는 분기탱천해서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은 단 한 바가지의 물이야. 먼 훗날 천하의 물을 다 가져다준들 내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라고. 군자의 말 중에 ‘부덕의 소치’라는 말이 있다. 듣기에 따라서 뜬구름 잡는 소리
[용인신문] 복숭아 나무와 오얏나무는 진딧물부터 하루살이 벌레들이 많아 앉아서 쉴만한 장소는 못된다. 그럼에도 그 나무 아래는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다. 단맛나는 과일 때문이다. 덕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다. 권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히 사람들이 모인다. 거기에는 덕이라는 단맛을 나눠줄 수 있어서다. 옛 백성들은 훌륭한 군주의 조건으로 덕을 꼽는다. 덕이란 백성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주는 행위라 한다. “군주가 훌륭한지 아닌지, 저잣거리의 일반 백성들이 어찌 알랴.”하고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는 군주가 더러 있기도 하나 백성들은 어느 군주가 경제적 이득을 줄 군주인지 아닌지 분명히 안다. 그 군주를 모르겠거든 그가 쓰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라 했다. 주역 중지곤괘 제1효에 나오는 말로, 가을 서리가 밟히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닥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군주가 어떤 사람을 들어쓰느냐에 따라서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풍성한 가을이 오느냐, 아니면 춥고 배고픈 빙하기가 오느냐를 가늠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목수라도 나무를 켤 때는 먹줄을 따르는 법이다. 이는 곧 행정경험을 말한다. 행정경험이 풍부한 군주가 나와서 백성들의 삶에 질을
[용인신문] 조선에는 3대 암군이 있다. 서자 출신 방계 임에도 16세에 권좌에 오른 선조는 1608년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55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재위 기간으로만 친다면 장장 41년이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결딴낸 인물이기도 하다. 아홉 단으로 쌓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손은 뒤로 묶고,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짊어지는 함벽여친銜璧輿櫬의 예와 한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찧어 피를 내기를 세 번씩 모두 아홉 번을 해야 한다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욕을 당한 인조. 1790년 명군 정조가 서른아홉 나이에 수빈 박 씨에게서 득남하는데 그 아들이 훗날 승어부를 못한 조선왕조 멸망의 문을 연 임금 순조다. 나라를 망쳤음에도 백성 누구도 그런 임금을 탄핵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어두웠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되는 데는 백성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임금을 먹여 살리는 것은 백성들인데 백성에게는 세금 낼 의무와 부역의 책임만 있고, 권리는 없던 셈이다. 어리숙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어두운 시대임이 분명했다. 그나마 지금은 세상이 조금은 밝아져 최소한 나라를
[용인신문] 맹자가 살던 시대에 현자가 셋 있었으니, 그 중 양주는 “내 몸에서 한 호리의 털을 뽑아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고, 묵자는 “내 머리 꼭대기 정수리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막은 “양주도 묵적도 다 틀렸다”며 그 중간을 잡은 인물이다. 맹자는 이 세 현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양주는 인仁을 해치는 자요, 묵자는 의義를 해치는 자며, 자막은 시중時中을 해치는 자이니, 이 모두는 하나를 들어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 맹자는 “훌륭한 임금이 나오질 않아 제후들은 방자해졌으며 처사들은 멋대로 정치를 했고,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를 휩쓸었다. 천하의 말 중엔 양주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묵적에게 귀의한다”고 말했다. 양주나 묵적이나 자막 이들은 개인적으로 볼 땐 나름 훌륭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맹자는 굳이 조목조목 예를 들어 이들은 훌륭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림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있고, 군주를 가르치는 현자가 있는 것이다. 공자가 쓴 춘추
[용인신문]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주나라를 중심으로 제후국이 있는데 주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왕이라는 호칭을 쓸 수가 없다. 이에 주나라 왕은 제후국 군주들에게 작위를 주는데 나라의 도덕적 역량 및 벼리의 조건을 따져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이렇게 다섯 개의 작위를 구분해서 내려준다. 공자의 나라인 노魯나라는 첫 번째 서열인 공公이 아닌 두 번째 서열 후侯라는 작위를 받는데 공자는 춘추경을 기록하면서 후侯의 지위에 있는 魯나라를 공公의 지위로 올려 군주의 명칭을 장공, 희공, 소공, 애공, 이런식으로 기록한다. 이는 魯나라만이 역사 기록의 중심이라는 공자만이 할 수 있는 필삭筆削인 셈이다. 여기서 노나라 국정의 독특한 면이 있는데 군주와 신하로서의 국정운영이 아닌 여러 명의 대부와 읍재들이 각 지역을 나눠 맡아서 노나라 국정에 함께한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이 있고, 각 당의 당수가 있는 거와 비슷한 이치이다. 여기다가 노나라에는 종속한 부용附庸국이 있다. 주루邾婁나라와 또 속국 주루邾婁 속나라가 그런류의 나라들이다. 문제는 각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들이나 혹은 부용국 또는 속국 중에서 백성을 잘 먹여살리지 못하는 대부라든가 읍
[용인신문]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장땡”이라는 말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뒤틀린 결과 우월론이다. 이왕 갈 서울이라면 바로 갈 것이지 왜 하필 모로가야 겠는가. 물론 거기에는 나름의 고충은 있으랴. 다수가 그렇게 한다 해도 그렇게 해선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치인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치국과 평천하에 앞서 수신과 제가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선은 나를 돌아보고 내가 무흠한가 그렇다면 가족을 돌아봐야 한다. 여기에서도 누군가에게 책잡힐 일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치인治人길로 들어서도 된다. 나와 내 가족은 의혹 투성이 인데 남을 다스리겠다고 한다? 그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출마자야 당선만 되면 그만일지 몰라도, 이쯤 되면 국가의 부끄러움이요, 국민의 수치다. 국가라는 거대의 집단을 책임지고, 국민을 이끌어가야 하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는 거기에 걸맞는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공약이랍시고, ‘던지기’ 식으로 뱉어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경박한 일은 없으리라.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 왕과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천하를 잃
[용인신문] 논어 학이편 첫 문장을 요약하면 세 마디로 압축된다. ‘배워서’ ‘기뻤는가’ ‘그렇다면 군자되시게’ 이다. 곧 공부는 기쁘게 하되 그 완성은 군자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군자라는 말은 한마디로 ‘이거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군자라 하면 훌륭한 사람 정도쯤은 된다. 군자에 이르는 과정에는 몇 개의 덕목이 있다. 대학 책에서는 이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명토 박는다. 연의하여 풀어쓰면 이렇다. “몸을 닦았는가? 그렇다면 결혼을 하시게. 결혼해서 가정을 잘 이끄셨는가? 그렇다면 치국을 하시게. 치국을 해서 나라 안 온 백성들이 등따습고 배불렀는가? 그렇다면 평천하를 하시게.”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얼추잡아 2000하고도 500년 쯤 전에 공자 아들의 아들이 제자를 가르치면서 했다는 말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거, 그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정을 이끈다는 거, 그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에서 비롯된다. 착하게 살면서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멀리하는 거, 이것이 몸을 닦는 수신의 첫 번째 덕목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어온 말중에 하나가 “착하게 살거라”라는 말일 것이다. 부모
[용인신문] 논어 술이편7-18 문장에 섭땅의 군주 섭공이 자로에게 물었다. “그대의 스승 공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에 대해 자로는 단 한마디도 못했다. 아마도 스승께서 워낙 크신 분이시라 딱 잘라서 말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자로는 돌아와 스승께 섭공과의 만남에서 스승이 어떤 분이냐 묻기에 “저는 차마 뭐라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니 공자는 수제자 자로의 속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없이 분기탱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왜 말하지 못했느냐?”라고. 아마 모르긴 해도 공자는 서운했으리라. 명색이 수제자라고 자처하는 것이 스승을 위해 나팔은 고사하고 뽐뿌질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니 꽤 서운했으리라. 이와 비슷한 일이 사마천 사기에 기록이 있다. 계손사의 아들 계강자는 용인술에 능한자다. 노나라 애공 7년 때 오왕 부차하고 영토분쟁으로 마찰이 있을 때에도 공자의 제자 자공을 보내 싸움의 물줄기를 아예 월나라로 돌려버린 일도 있다. 이로 인해 오나라와 월나라는 죽기살기로 싸운다. 흔히 오월춘추의 고사가 쏟아져나온 전거가 이 때문이다. 제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는 공자의 제자 염유를 좌장군으로 삼아 승전보를 울린다. 이일 후 사기공자 세가편
[용인신문] 소문난 잔치 망건 팔더라고? 지금 강호는 차기 대권을 누가 거머쥐느냐로 생난리가 났다. 이제 팔 십여 일만 지나면 누가 되는 그중에 한 명은 대통령이 된다. 남아로 태어나 나이가 스물이 먹도록 나라를 평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군들 나를 남아라 하겠는가. 이십 중반 나이에 느닷없는 모함으로 비명에 횡사로 남이장군이 썼다는 시구인데 이게 어찌 스물 갓 지난 약관 선비의 붓끝에서 나온 경구라 하겠는가.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호연지기라 하겠다. 이십 대 중반 나이에 병조판서를 지냈다는 남이南怡로 말할 것 같으면야 17세에 무과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썼다는 북정가. 예종 원년 1468년에 역모로 간신배들의 낡은 것은 없어지고 새것이 펼쳐질 징조라는 제구포신지상除舊布新之相에 죽어갈 때까지 숨 가쁜 일생이었으리라. 조선 개국공신 전 영의정 남재南在의 현손이요 태종대왕의 부마인 의산군 남휘南暉의 손자요 아버지 군수 남빈에 이르기까지 왕족 대우를 받았다 하니 그야말로 조선사에서 몇 안 되는 명문 중의 명문의 손이다. 어디 이뿐이랴 한명회. 신숙주. 권람. 수양대군 3걸로 불린다는 그중 장인이 권람이라는 데야. 그러나 일찍 피는 꽃이 빨리
[용인신문] 맹자 이루-장구 하편에 “군주가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일이 있다면 선비는 주인을 바꾼다”고 했다. 시경 관저편엔 ‘언자무죄言者無罪 문자족계聞者足戒’라는 말이 있다.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나니 듣는 사람이 경계로 삼으면 족하다”라는 말이다. 논어 양화 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선비가 덕을 버리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길에서 들은 것을 길에서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저잣거리의 말을 확인도 안하고 옮겨 대면 안 된다는 경책이다. 그럼에도 예외조항을 두는데 시詩가 그것이다. 논어 위정편의 기록은 이렇다.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삿됨이 없다. 사람 살이에는 크게 두 개의 줄기로 나뉜다. 오늘만 살 것인가, 내일 저 너머에까지 살 것인가. 논어 위령공편의 기록은 이렇다. 군자는 죽기 전에 명성을 알리기를 원한다. 그런데 400년 후 사람 사마천은 죽기 전의 명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죽은 다음날 아침에 있을 자신의 초상화에 대해서만 걱정한 인물이다. 보임안서報任安書는 이렇게 심정을 밝힌다. 내가 구차하게 살기 위해 더러운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비루하게 죽어 후대에 나의 글이 드러나지 않을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용인신문] 중용 20장에서 애공이 ‘정치’를 물으니 공자는 “사람이 있으면 정치는 행해질 것이지만 사람이 없다면 정치는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사람은 백성을 위하는 군주다. 시경에 “은나라가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았을 때는 능히 하늘과 좋은 짝”이라고 했다. 이것은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 것이고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정조 이산은 오경백편 대학 10장주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고자하는 위치에 있는자라면 덕 쌓기를 애쓸 것이니 덕이 쌓이면 백성이 따를 것이고, 백성이 따르면 땅을 얻으며, 땅을 얻으면 재물이 날 것이며, 재물이 나면 이에 따른 쓰임이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재물의 쓰임은 백성들에게 최소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수기치인이다. 사실 공자의 모든 답변은 수기치인 네 글자로 설명이 가능하다. 수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요, 치인은 개인의 욕심보다는 공적이고 정의로운 욕심이 더 강함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통치행위는 어렵다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쉽다면 또한 쉬울 수도 있는 일이다. 곧 국민을 불안과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