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토지공사가 사업시행자가 되어 2006년 12월 31일까지 98만 평 규모의 동백지구를 조성하였다. 용인특례시 기흥구의 동백동이 ‘동백신도시’가 아닌 ‘동백지구’인 것은 그 규모가 ‘98만 평’이기 때문이다. 택지개발지구가 신도시라고 지칭하려면 100만 평 이상이어야 한다. 신도시를 건설하려면 광역교통대책 수립 기준이 강화돼야 하는데 한국토지공사가 이를 피하기 위해 2만 평을 줄여 98만 평 규모로 택지개발을 했던 것이다. 동백지구는 엄밀히 말하면 동백1동과 동백2동만 해당한다. 동백3동은 이른바 ‘신동백’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동백지구가 조성되자, 민간사업자들이 동백지구 동백죽전대로 건너편에 있는 녹지의 도시숲을 헐어낸 뒤 야산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곳이다. 민간사업자들이 택지개발을 한 동백3동은 전주와 송전선로 및 통신선로가 지중화 되어 있지 않는 등 도시 인프라 측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다. 출발이 달랐지만 동백1동과 동백2동, 그리고 동백3동은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이제 동백지구는 동백3동을 품고 8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는 ‘동백신도시’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동백지구가 ‘동백신도시’로 거듭나게 되려면 몇
용인신문 | 정치가 국민의 삶에 1도 도움이 안된다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도 없으리라. 물론 돈을 쟁여놓고 사는 사람들이야 ‘이대로’를 외치며 작금의 세상이 천국이겠지만 돈을 박스로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다수의 서민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옛날 고리짝 시절에 나라를 무려 50년간 다스린 임금이 있었다. 요 임금이 그다. 한번은 백성들이 어찌 사는가를 보고자 하여 민복으로 환복하고는 저잣거리를 지나는데 저만치 그늘 아래서 젊은이 한 무리가 작대기로 토닥토닥 땅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더란다. 노랫소리를 들어보니 잘 먹고 잘사는데 임금의 은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듣기에 따라서 험담 같기도 하고, 그러나 요임금은 똑똑한 임금인지라 그 노랫말의 의미를 금새 알아차렸다. 가장 훌륭한 정치는 백성이 임금이 누군지도 모를 만치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정치다. 그렇게 흐뭇하니 그 자리를 지나 또 어느 만치 가니 늙은이들이 드러누운 채 손가락으로 배를 까딱까딱 두드려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해 뜨면 일어나고 해 떨어지면 쉬니 밭 갈고 우물 파서 물 마시니 임금이 누군들 내게 무슨 소용이랴. 이 또한 험담 같기도 한데 또 꼭 그런 것만
용인신문 | 모으는 것을 ‘벌다’라고 한다. ‘벌다’는 간격을 넓힌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돈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용된 것은 상평통보이다. 동그란 모양은 하늘을, 가운데 구멍은 땅의 의미가 담겨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유통되는 보물이라는 것이다. 가운데의 네모난 구멍에다 끈을 꿰들고 다니면 돈꿰미라 불렀다. 끈은 얼마든지 간격을 벌릴 수 있었다. 탐욕은 돈의 무게와 비례했다. 19세기 조선은 돈꿰미를 벌리려는 몇몇 세도가들의 탐욕으로 무너져갔다. 대한제국 시기의 탐관오리들은 차고도 넘친다. 그중에서 최고는 평안감사 민영휘였고, 두 번째는 최석조였다. 이용익의 추천으로 전환국장(지금의 조폐국장)에 임명된 최석조는 백동화의 금속 함량을 속여 주조했다. 원래 악화(惡貨)였던 백동화의 가치는 떨어졌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나 그는 짧은 기간에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최석조의 말로는 비참했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의 고문으로 온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으로 인해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으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은 당연하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권력형 축재는
용인신문 |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김건희 여사 문자를 둘러싼 폭로전으로 치달리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는 예외 없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있다. 한동훈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고 총선 준비에 여념이 없던 지난 1월 15일부터 25일까지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이른바 ‘디올백을 둘러싸고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문자를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보냈다. 문자는 모두 5통으로 밝혀졌는데 문제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김 여사의 문자를 읽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서 ‘어대한’이라는 신조어가 떠돌 정도로 한동훈 대표가 앞서자 친윤 대표를 자임하는 원희룡 후보는 역전을 위한 한방이 필요했다. 그 한방은 ‘여사님 문자를 읽고 씹었다’는 문자 파동으로 나타났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문자를 터트린 측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할 뿐 특정된 사람은 없다. 다만 한동훈 후보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사님 문자를 터트린 측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한동훈 대세는 견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정치평론가들의 일치된 평가다. 결과는 7월 2
용인신문 | 하의 성인 공자께서 일생을 사시면서 사람을 잘못 보고 실수한 것이 두 개가 있다. 한비자 현학편과 공자가어 72제자해 편에 각각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언언이라는 공자의 직계 제자가 무성 땅의 재상으로 있으니 공자께서 제자 언언에게 이렇게 묻는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쓸만한 인물을 얻었느냐?” 하니 제자가 답한다. 자우라는 사람을 얻었는데 그는 길을 가더라도 사잇길로 가는 법이 없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집무실에 오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 자우라는 자를 만나보니 외모가 너무 추한 것이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생활을 보니 그를 스승으로 따르는 제자가 장장 3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의 삶 또한 군자의 풍모가 잔뜩 묻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또 한번은 공자의 직계 제자 재여는 말씨가 정제된 언어를 쓰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고상하고 세련되기가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나 함께 거하면서 그의 생활을 보니 그의 말솜씨와는 전혀 딴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 내가 외모만 보고 사람을 취했다가 자우에게서 실수를 했으며 말솜씨만 믿고 사람을 취했다가 재여에게서 실
용인신문 |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후보는 비록 단서를 달았지만 당 대표가 되면 채상병 특검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결론부터 말해 채상병 특검은 한동훈 후보가 대표가 되기 전에 즉각 실시되어야 한다. 지난 6월 21일 국회에서는 법사위원회 청문회가 열렸고, 국민은 채상병의 순직을 둘러싼 의혹은 특검으로 전모를 밝혀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윤 대통령은 자청하여 특검을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국군통수권자로 국민에게 당당하게 책임지는 길이다. 청문회에서는 대통령의 전화가 쟁점이 되었다. 윤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중인 이종섭 당시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격노했고, 이후 경북경찰청에 이첩되었던 사건 수사 기록이 회수되었다. 특검이 실시되면 대통령이 수사에 개입했느냐가 중점적으로 조사된다. 청문회 결과 대통령의 전화가 사건 기록회수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박정훈 대령은 ‘대통령 격노’의 실체를 상세하게 증언하였다. 22대 국회에서 채상병 특검법은 재발의 되었다. 한동훈 대표 후보가 특검 수용으로 선회한 이상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도 어렵게 되었다. 어차피 실시될 특검이라면 대통령이 전향적인 자세로 나가야 한다. 윤 대통령만 태도를 바꾸면
용인신문 | 1901년에 폴 쁘레상과 안톤 쁘레상 형제가 서울에 왔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조선관’을 보고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땔감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쁘레상 형제가 선택한 방법은 ‘공짜 커피’ 제공이었다. 육조거리(광화문) 근처에 있다가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장수들에게 커피 한 잔씩을 주면서 거래를 시작했다. 커피 맛에 중독된 나무장수들은 쁘레상 형제들에게만 나무를 팔았다. 10여 년 만에 서울 땔감의 반 정도를 독점한 그들은 1920년대부터는 화장품을 팔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직수입했다고 선전한 화장품은 돈 많은 부인들과 기생들이 주고객이었다.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일본이 유럽산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자 비밀공장을 차려놓고 ‘쎄봉’이라는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 ‘가짜’는 ‘명품’으로, ‘국산’은 ‘프랑스 산’으로 둔갑하여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쁘레상 형제는 파리 만국박람회장의 조선을 처음 알았을 것이다. ‘조선관’에 걸린 고종의 초상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심 좋아 보이는 조선 왕의 얼굴을 보고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조선에 대해 얼마나 알았는지는 모른
용인신문 | 당나라 때의 문장가 유종원의 ‘귀주의 당나귀’ 이야기 한 토막이다. 귀주 땅에는 본래 당나귀가 없었다. 혹자가 당나귀를 구해와 풀어놓으니 이를 처음 본 호랑이는 당나귀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그것을 짐승의 신으로 여겨 조심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는 호승심이 생겨 당나귀를 이리 툭 저리 툭 쳐보기도 했으나 당나귀는 그저 헛발질만 한 두 번 할 뿐 별반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호랑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별거 아니잖아’ 그러고는 당나귀 목줄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배불리 잡아먹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글의 말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당나귀는 몸체가 큰 탓에 덕이 있는 듯했으며, 우는 소리는 우렁차서 기량이 높은 듯 했나니, 만약에 자신의 틈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호랑이는 감히 덤비지 못했으리라.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한번 밀리는 순간 그 명줄은 단번에 물어뜯길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것을 다시 되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국민은 앞서 박근혜 전직 대통령을 통해서 임기 중임에도 대통령으로서 직무가 시원찮을 때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음을 두 눈 똑똑히 뜬 채
용인신문 |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인 인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풍문이 한국 사회에 나돌기 시작한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방 대학의 불어불문학과와 독어독문학과에서 번지기 시작한 인문학 학과 폐과의 불길은 수도권 대학의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문예창작과로 번지고 있다. 작년 9월 초 필자는 남해군의 의뢰를 받아 남해군이 주관하는 김만중문학상을 심사하기 위해 남해유배문학관을 다녀왔다. 김만중문학상은 시와 소설로 나누어 심사가 진행되었고. 소설 부문의 심사는 대상 부문과 신인상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소설 부문 본심은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집들을 놓고 소설가 백시종 선생과 필자가 심사를 진행한 결과 대상 부문에는 김연수 소설가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선정되었고, 신인상 부문에는 김지연 소설가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 가 선정되었다. 한편 필자는 올해 5월 초 안산여성문학회가 주최하고 안산시 등이 후원하는 안산전국여성백일장의 산문 부문 심사를 의뢰받아 한양대 에릭카 캠퍼스를 다녀왔다. 안산전국여성백일장은 시 부문과 수필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산문 부문 본심은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들
용인신문 | 연습생 기간을 거쳐 데뷔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이 투자된다. 데뷔를 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연습생에게는 엄청난 행운이다. 엔터산업은 사람에게 투자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철저한 자본주의 사업이기 때문에 연습생의 가능성을 홍보하고 투자를 받아서 아이돌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낸다. 성공 확률에 비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지만, 성공만 한다면 투자금 회수와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믿음 덕분에 K-팝 생태계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그것이 K-팝 생태계의 근간을 흔들어버렸다. 바로 ‘인간의 감정’이라는 변수다. 그녀의 남다른 재능과 능력을 눈여겨본 대표는 스카우트 제의를 했고 두 사람의 만남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성공적인 걸그룹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조직 내에서 재능과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호의적인 만남이 ‘성공’이라는 결과 앞에 ‘감정’이라는 소용돌이를 만난 것이다. 재능있는 사람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재능이 독이 되어 조직을 함정에 빠뜨리게 된다. 황금알을 낳는
용인신문 | 스승의 그림자만 밟았을 뿐인데 이를 불경으로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스승은 하늘이라며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던 시대도 있었다. 더 먼 옛날에는 스승이 길을 가면 제자는 늘 한 발 짝에서 좀 더 물러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따르던 제자들도 있었다. 상고시대에 요 임금에게는 허유라는 스승이 있어 마음의 곧음을 가르쳤다. 허유에게는 설결이라는 스승이 있어 몸의 바름을 가르쳤고, 설결에게는 왕예라는 스승이 있어 어른의 말에 순종하는 바를 가르쳤다. 왕예에게는 피의라는 스승이 있어 남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도리를 가르쳤다하니 훗날 퇴계 이황 선생은 이러한 가르침을 일러 말하길 곧 공경의 가르침이라 했다. 이러한 공경의 가르침은 당대에서 끝난 게 아니라 후학의 가르침을 통해 이어지는데 율곡 이이 선생은 제자 사계 김장생을 가르치면서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반드시 공으로 섬기고 경으로 순종하라고 했다 전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제자를 향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람됨의 가르침이요, 인성의 가르침이요, 성품의 바름을 향한 가르침이다. 요즘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먹고사는 실용의 문제와 거리가 멀다하여 뉘집 개가 짓냐는 식으로 외면시 당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스승의
용인신문 |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 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1905년 11월,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됐다. 1911년 11월 2일 <경남일보>에 게재한 천장절(메이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에 ‘일왕을 태양으로, 일제를 동양의 중심’으로 묘사했다. 장지연은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도 친일 시를 여러 편 썼고 논설 주필로도 활동했다. 2010년에 이명박 정부는 장지연의 서훈을 취소했다. 후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대법원 판결로 2015년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 을사늑약과 을사오적에 상반되는, 언론 저항의 상징으로 꼽았던 논설을 쓴 장지연의 변절을 교과서는 다루지 않았다.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애국계몽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남았던 이유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의 방증이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의회설립을 요구했다.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허수아비 의회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