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의 세설 청와대 CCTV가 있는 이유 대한민국 헌법은 외국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토 박아 놓은 헌법 제 1조 1항의 문구가 그것이다. 그 다음 대한민국헌법의 꽃이라는 헌법 제1조 2항은 기막힌 문장으로 쐐기를 박는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이 또 있을까? 민주공화국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민으로부터 국가를 운영할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큰 일꾼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순간부터 사생활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대통령의 권한 행사 또한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은 대통령 재임기간 대통령의 행동은 국민의 여론과 함께 가야한다. 청와대에 CCTV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청와대에 CCTV를 설치한 이유는 국민이 대통령을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민에게 투명하기 위함이다. CCTV하면 오버 랩 되는 것이 지난4월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대통령의 청와대 경내 7시간의 행적이다. 이를 두고 김기춘 비서실장은 박근혜
우농의 세설 책기교서담 담화문 후 벌써 6개월.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에 하늘은 벌을 내릴 징조인 구징(咎徵)과 상을 내릴 징조인 휴징(休徵)을 말한다. 휴징과 구징은 각각 다섯 가지 항목인데, 결론은 이렇다. 정치를 잘하면 하늘이 상을 주고(휴징) 정치를 못하면 하늘이 벌을(구징) 준다. 한(漢)나라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이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 했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은 조선 거유 백호 윤휴 왈, 임금 한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모든 백성이 여기에 힘입고 온 나라 만방(萬邦)에 죄가 있으면 그 죄가 임금의 몸에 짐궁(朕躬)이 있다. 홍재전서 일득록(弘齋全書 日得錄) 1783년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나자빠지자 임금인 정조 왈,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고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니 백성이 있은 뒤에야 나라가 있다. 나는 백성을 위 할 뿐이라며 책기교서를 발표하는데 그 시발은 죄기조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주(周)나라 장공(莊公)11년(서기 전 686년)가을. 송나라에 큰 홍수가 나자 주나라 장공이 사자를 보내 위로하니 송나라 군주가 답을 한다. 고(孤제후의 자칭)가 못나서 하늘이 재앙을 내렸습니다.라고. 고려사 현종
우농의 세설 가장 위험한 삐라. 1000년 동안 잊혀진 사상가를 꼽으라면 단연 맹자가 으뜸이다. 그런 그가 남송의 유학자 주자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아성(亞聖)의 반열에 선다. 결국 맹자는 진보 유학자들에 의해 논어가 성리학의 이념을 지탱해주는 책이라면 맹자는 성리학을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좌우서가 된다. 하지만 맹자라는 책은 기존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책이다. 결코 권력 이데올로기로 순화될 수 없는 책이란 말이다. 그만큼 맹자라는 책은 급진적 혁명사상을 담고 있는 매우 불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삼봉과 포은은 서당동기지만 포은이 오년 배다. 일찍이 삼봉은 맹자를 천 번 이상 읽은 사람이다. 정도전은 20세에 성균관에서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진사시에 급제, 얼마 후 부친상으로 3년 시묘를 사는데 포은이 맹자 책을 준다. 서당시절 삼봉이 맹자를 외운다는 걸 포은이 모르지 않을 터. 고개를 갸웃하며 포은이 건네준 맹자 책을 토씨하나 안 빼놓고 하루 반 장 이상을 넘기지 않으며 아주 느리게 경전 해석하듯이 읽는다. 그렇게 시묘 살이 3년 기간 동안 맹자를 읽으면서 비로소 역성혁명을 꿈꾼다
우농의 세설 한 줄에 목숨 건다.2 주모(朱謀 주자주희는 성현의 글 고본경서(古本經書)가 너무 고준(高峻)하여 별도의 고전 읽는 법을 정리해 놨는데, 집전(詩經集傳)과 본의(易經本義)와 집주(論語集注 孟子集注)와 장구(大學章句 中庸章句)다. 그중에 죽기 사흘 전까지도 수정을 거듭한 책이 대학 책인데 원문 고본(古本)에 대학은 구(句)로만 되어있어 장(章)으로 나누는데 구(句)가 맞지 않아서 제5장 격물 치지 장에 이르러 차위지본(此謂知本-이를 일러 지본이라 한다)과 차위지지지야(此謂知之至也-이를 일러 앎의 지극함이라한다)사이에 궐문(闕文-문장이 빠짐)됐다 판단하여 128자를 첨(添)한다. 이게 그 유명한 대학장구보만장사건(大學章句補亡章事件)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대학 책은 대학장구로 정명(定名)됐고, 왕가(王家)의 수신서로 승격되면서 제왕학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서 세권의 해설서가 나왔는데 대학강어(大學講語) 대학혹문(大學惑問) 그리고 중국 송(宋)나라 주자학파의 학자로서 서산선생(西山先生) 진덕수(眞德秀)가 제왕(帝王)의 첫 번째 조건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역설한 책, 곧 대학연의(大學衍義)다. 그 연의에 따르면 올바른 수신제가를 이룬 왕이라면 어떠한
우농의 세설 한 줄에 목숨을 걸다. 1. 경(經)과 전(傳). 주(注)와 소(疎) 그리고 비지(備旨) 오래됐다고 보물은 아니다. 가치가 있어야 보물이다. 이는 고전(古典)이며, 그중 핵심을 경(經)이라 하고 이를 전함을 경전(經傳)라 한다. 본래 경과 전은 천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쓰이던 말로 사마천에 이르러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경전이란 말을 묶어서 쓴다. 대저 유자들은 육예(六藝)로서 법을 삼으나 육예의 경전은 천만 가지나 된다.(夫儒者以六藝爲法, 六藝經傳以千萬數), 박물지(博物志/ 張華, 232~300). 성인이 지은 것을 경이라 하고, 현인이 풀이한 것을 전이라 한다.(聖人制作曰 經, 賢人著述曰 傳) 즉 성인의 말이 경이요, 경을 입으로 전해준 것이 전이다. 시경 서경이 있었고, 훗날 입으로 전해 시전 서전이 됐고, 주자에 이르러 경과 전에 대한 해설집 사서집주(四書集注)가 나왔다. 후대에 이르러 집주에 대한 해설집 소(疏) 다산의 논어고금소(論語古今疎)라는 또 다른 해설이 나왔다. 이에 대한 또 다른 해설로 비지(備旨)까지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재술하면 전은 경을 말로 전한 것이고, 주는 전을 해석한 것이고, 소는 주를 해석한 것이고,
우농의 세설 옥갑야화는 이렇게 말했다. 호암은 집이 부자였던 관계로 훈도(訓導)를 모셔와 사서 논어맹자중용대학를 익혔다. 그때 호암의 나이 7세 미만이었다. 유달리 총명했던 호암은 논어 499문장 중 위령공편의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에서 크게 깨닫는다. 반면에 아산은 집이 가난했던 탓에 직접 서당 훈장(訓長)에게 찾아가서 글을 배운다. 그렇게 읽은 것이 대학 책이다. 훈장은 대학 책을 사마천 사기에 빗대어 가난으로부터 부를 얻는 데는 농(農)은 공(工)만 못하고, 공은 상(商)만 못하다며 사마천 사기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어린 아산의 가슴속에 콕콕 박아 준 것이다. 대학 책은 대학강어, 대학혹문, 대학연의. 이렇게 세권의 별책이 붙을 만치 제왕의 학이기 때문에 대학 책은 천하에 뜻을 둔자가 아니면 읽을 이유가 없는 책이다. 그때 아산의 나이 9세다. 훗날 호암과 아산은 거부가 되어 삼성과 현대라는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는 양대 산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창업주 선대는 떠나고, 2세 경영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현대 정몽구 회장을 제치고 공히 수 십 년을 대한민국 넘버원으로 군림하다가 근자에 와서 이건희 회장의 와병으로 인해 3세 경
우농의 세설 귀신도 울고 갈 두 시인의 붓글씨-2 붓글씨의 기준은 일감사미(一感四美)인데 붓글씨를 감상한다함은 첫째, 글자의 위 아래 균제미. 둘째, 좌우의 조형미. 셋째, 탈 속적인 고박미(古薄美). 그리고 넷째는 글 전체적인 조화미(美)를 볼 수 있다. 이런 연후에야 시각적 생동감이 몸으로 체화된다. 그래서 붓글씨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붓글씨는 서예가가 아닌 방외지사 시인이나 고승의 글씨를 천하제일로 친다. 시인도 아닌데 고승의 글씨를 시인과 동격으로 놓는 이유는 시(詩) 자(字)가 절(寺)에서 하는 말(言)이 시(詩)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나 고승들의 마음은 자연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의미다.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은 71세(1840년)때 서예 이론서 서결을 쓰는데 붓글씨는 자연에서 비롯되어 음(陰)과 양(陽)이 생겨나고, 형(形) 세(勢) 기(氣)가 붓에 실려 부드러움과 거침, 바름과 기괴함이 생겨나니 세참과 빠름, 느림과 껄끄러움의 묘미만 터득하면 서예는 끝이라고 했다. 창암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호남 서단을 평정하며 유수한필(流水閑筆)로 필명을 떨친다. 서울의 천재(天才) 추사(김정희1786~1856),
우농의세설 문인의 붓글씨를 본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영광이 아닐 수 없다. 1 붓글씨는 처음과 끝이 일목요연은 하되 결코 획일적이어서는 안 되고 각 자마다 획순에 변화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같은 글이 겹칠 때는 어떤 형태로든 앞 글자와 다른 맛을 느끼게 써야한다. 우암의 고제 호남팔현 권상하가 조선육창의 맏형 창흡이 적소에서 죽자 그의 아들이 묘비명을 다 써와서 우암에게 수결(싸인)만 해 달라하니 때는 우암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던 중 이다. 우암 왈, 선비가 죽었거늘 어찌 가벼이 쓸 수 있겠는가라며 사약을 받던 것을 미루고 창흡의 묘비명을 써주었는데, 이것이 우암이 생전에 쓴 600여 편의 묘비명 중 백미로 꼽힌다. 이를 지켜보던 권상하가 우암의 손자 석주에게 했다는 말이라 전 한다.(이때 먹을 간 사람은 손자 석주라 한다.) 붓글씨는 크게 산 글과 죽은 글로 나눌 뿐 잘 쓰고 못쓰고를 논함은 군자가 할 짓이 못 된다. 권문세도가 종학(宗學)에서 나온 말이다. 그 권문세도가 문중 후학 중에 당대 1인자 서예가가 있는데 학교 문턱에도 안 가본 유학자 권우다. 권우는 일생에 한번 노년에 이르러 조선전통필법을 강의한적 있다. 그는 유학자답게 붓글씨도 률(律)로 쓴
우농의 세설 이제는 만나야한다. 중국 남송이 멸망한 1279년쯤 남송(南宋) 말에서 원(元)나라 초에 걸쳐 활동했던 증선지(曾先之)는 기존의 18종의 역사서를 저본으로 종합 역사서인 사략을 편찬하는데 이를 고금역대 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이라한다. 사략에는 수많은 고사가 나오는데 중구난방(衆口難防)도 그중하나다. 새김을 하면 대중의 소리는 막기가 어렵다 쯤 된다. 주(周)나라 제10대 려왕(勵王)은 폭군이다. 불평분자는 사찰했고 비방하는 자는 색출해서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 가가호호 조를 짜서 선동자를 밀고하면 포상을 했다. 백성들은 두려워 입도 뻥긋 못했다. 참고로 가화위국(家化爲國-가정을 바꿔 나라 되게 함)의 북한독재자 김일성 통치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사마천 사기 주 본기는 폭군 려왕의 일화를 기록한다. 려왕이 말한다. 보시오. 나를 비방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지 않소. 어떻소. 내 정치솜씨가. 하며 우쭐해하자 소공(召公)은 기 막혀하며 이는 도로측목(道路側目-길가다 만나도 처벌이 두려워 눈짓으로 의사를 표함. 三國志魏志)일 뿐이라며,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을 막으면 언젠가는 무너져 다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
우농의 세설 논어가 당신의 생각을 묻는다. 공자(孔子)는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구간에 불이 났던 사실을 알고 사람이 다쳤는가? 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廐焚. 子退朝曰, 傷人乎, 不問馬.) 이는 논어향당편(論語 鄕黨篇)에 나오는 말로, 사람을 귀히 여긴 공자의 인품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불문마는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사람이 더 귀함을 비유하는 말로 회자된다. 하지만 백호윤휴의 생각은 달랐다. 한문은 특이하게도 구두점과 방점의 위치에 따라서 해석과 새김이 전혀 달라진다. 상인호불. 문마(傷人乎不/ 問馬).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가 물어본 뒤에 말에 대해 물었다가 윤휴의 해석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해도 말보다 사람의 안위를 우선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 경전의 전통적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던 교조적 사대부 사회에서는 이런 해석을 용납지 않는다. 우암과 진외가를 한집으로 둔 깨벅쟁이 친구 윤휴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 이유이기도 하다. 백호윤휴는 논어에 관한한 방점 문장의 끝점과 구두점 문장의 쉼표에 관해서는 당대 1인자였다. 어려서부터 골계(滑稽)학습 구두점이나 방점없는 책으로 공부하는데 고
1597년 1월 겨울.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유키나가)과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이)은 싸워서 마치 수뇌부에 권력다툼이 있는 것처럼 한다. 이틈에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그들을 물리치라 한다. 무경칠서를 토씨하나 안 빼고 다 외우는 그가 조호이산(調虎移山)의 간계를 모를 리 없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명을 작전상 거역한다. 조정에서는 왕명 불복종 죄로 이순신을 참수하라며 1597년2월26일 포박한 채 한양으로 압송, 3월5일 의금부에 투옥한다. 죽음에 준하는 고문으로 죽이려 했다. 조호이산이란 관자(管子)의 형세해(形勢解)에 나오는데 호랑이는 산속에 있어야 위엄이 있고, 군주도 자신의 용상에 있어야 위엄이 있다. 그러나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오면 그 위엄은 사라지고 오히려 잡히기 쉽다. 공전계(攻戰計)는 이를 모든 상황이 적에게 불리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위험에서 벗어난다.(待天以困之 用人以誘之 王蹇來返. 三十六計. 十五計攻戰計)고 해석한다. 이 말은 포박자에 나오는 말인데 루항의 어로 의역하면 호랑이를 개집에 넣으면 개만도 못해진다는 말이다. 이때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欺罔朝廷無君之罪)와 적을 치지 않고 국가를
한 초부(樵夫나무꾼)가 있었다. 가문은 한미했고 삼세이전의 선 망부독자다. 춘추공량전(春秋穀梁傳)의 글처럼 아버지가 없으니 스승을 찾지 못했고, 스승을 찾지 못했으니 글을 배우지 못했고, 셈 또한 알리가 만무했다. 저자에서는 그를 일자무식이라 불렀다. 땔감을 장에 팔아 받은 돈으로 곡식을 바꿔 어머니를 봉양한다. 참으로 효자다. 어머니는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같은 말은 한다. 주고, 지고, 놓고 살아 갖지 말고 남에게 주고, 이기지 말고 남에게 지고, 욕심 부리지 말고 놓고 살란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이 또 있으랴. 하늘은 효자를 외면하지 않는 법. 탁발 나온 승려가 주막문전에서 금강경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를 외자 마침 주막에다 장작을 팔고 나오던 그가 듣는 순간 깨달아 출가를 결심 한다. 이른바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돌아와 어머니께 하직 인사올리고 호북성 풍무(湖北城 馮茂) 동산사(東山寺)에 머물던 호북성 황매(黃梅)현 출신 5조(祖) 홍인(弘忍) 601-674에게 출가한다. 홍인문하엔 일천 명이 넘는 문도가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자리에서 홍인화상 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