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그는 키가 크다. 그의 어깨는 늠름하다. 그의 손바닥은 넓다. 그는 멀리 있어 내가 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늘 내 곁에 있다. 나는 매일 그를 본다. 나의 사랑하는 개오동나무. 처음에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달리 볼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친정언니들이 사는 평촌에서 오래 살았다. 언니들 근처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막내인 내게 언니들은 김치도 담아주고 반찬도 해주고 애들도 돌봐주었다. 용인으로 이사 온 후 언니들과 밥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던 일상들이 사라졌다. 마치 언니들이 나를 따돌리고 저들끼리만 극장에 갔던 어린 날처럼 나는 버려진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가 다가왔다. 거기 아름다운 나의 개오동나무. 나의 개오동나무가 살랑거리기 시작하면 봄이 무성해지고 나의 일상도 기지개를 켠다. 그는 나를 다 안다. 내가 언제 일어나 커튼을 여는지. 누구의 전화를 받고 무슨 책을 읽는지, 오늘은 공원을 몇 바퀴 걸었는지, 왜 밤을 지새우는지....... 나의 개오동나무는 산길 입구에 서서 모든 계절을 다 지켜본다. 초봄에 산수유와 목련이 피고, 오솔길에
[용인신문] 아파트 단지를 걸으면 짙푸른 녹음이 싱그럽다. 과천에서 용인으로 둥지를 튼 지 어느새 19년이 흘렀다. 가느다랗던 나무들이 나와 세월을 함께 하며 어깨가 넓은 나무가 되었다. 여름이면 전성기를 맞은 나무들이 이파리를 찰랑이며 그늘을 준다. 가끔은 단지와 연결되는 인근에 낮은 산을 오른다. 산행을 하다 보면 가까이에 00골프장 파란 잔디가 한눈에 들어온다. 필자는 금융업에서 일하다 IMF 때 퇴직했고, 그때부터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처음엔 공이 잘 맞질 않고 힘만 들어가고 재미를 못 느꼈다. 작은애를 늦게 낳아서 뒷바라지 하느라 한동안 골프를 접었다가 몇 년 전에 다시 골프를 시작했다. 지금은 골프가 참 재미있다. 좋은 사람들과 라운딩을 하면 힐링도 되고 인생도 깊어지는 기분이 든다. 용인에는 골프장이 많다. 골퍼들의 천국이다. 필드엔 어쩌다 나가지만 연습장에 가서 한 볼 한 볼 신중하게 볼을 칠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있다. 공을 칠 때는 집중하게 되고 폼을 하나씩 가다듬고 볼을 쳤을 때 거리감이 늘면 성취감이 있다. 자식과 골프는 내 맘대로 안 된다고 어느 재벌 총수도 얘기했듯 골프는 실력을 연마해도 그날 컨디션이 안 좋으면 멘탈이 붕괴되고 볼
[용인신문] “용인 시장님이 너한테 축하 카드를 보냈네” 카드를 건네자 딸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나를 쳐다봤다. 발신인은 용인 시장이었고 올 해 성년이 된 딸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형식적인 축하 카드일 수도 있지만 그 카드를 읽은 딸의 표정은 밝아졌다. 공식적으로 성년이 되었음을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치열한 입시를 치르고 대학생이 된 딸은 미성년이던 시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급하게 누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고, 귀가 시간은 자꾸 늦어졌다. 미성년으로서 금지되었던 많은 것들이 해제되면서 성인이 된 의무보다는 권리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자유와 방종을 운운하며 잔소리를 해대곤 했다. 그런데 시장이 보낸 축하 카드를 보며 정작 엄마인 나는 딸이 성년이 되었음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딸을 고등학생 취급하며 구속하고 있었다. 딸은 이제 시장으로부터 성년 축하 카드를 받을 만큼 커버렸는데 엄마의 생각은 딸을 성년으로 생각할 마음도 성년이 되었음을 축하할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자녀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면 부모들은 감격하며 입학식에 참여한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의
[용인신문] 내 고향은 영동고속도로 양지교차로에서 백암 쪽으로 5리쯤 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이다. 옛주소가 용인군 내사면 제일리 산매동 새말이었다. 산에 매화가 많아서 산매동이요,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말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매화 같은 건 본적도 없고 새로 지은 집도 없던 가난한 시골이었다. 지금은 온통 아름다운 전원주택들이 들어서서 첩첩산골 갑갑했던 그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는데, 어렸을 때는 사실 고향산천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멀리 5리 길을 걸어 제일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산길은 헐벗어 미끄럽고,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산등성이를 따라 놀다보면 불쑥 불쑥 나타나는 묘지들도 무서웠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가 물려받은 땅이라곤 논 400평과 1000평 조금 넘는 야산뿐, 외할아버지가 사준 350평짜리 밭까지 다해도 4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벅찼다. 시흥군 군포의 부농의 딸이던 어머니는 큰아들인 나를 1년에 몇 달씩 군포 외가에 보내 글과 숫자도 배우고 살도 찌게 했다. 외가 식구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푸근해지는 좋은 분들이었다. 시흥군 군의원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내외와 대학 나온 외삼촌과 이모들 모두 더없이 밝고 공정하고 다정한
[용인신문] 해외유학 6년 그리고 부산생활 11년…, 17년째 나는 용인을 벗어나 살고 있다. 부산에서 우연히 용인사람이라도 알게 되면 마치 오랜 지인을 만난 듯 한톤 높은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용인이 고향이 아니라면 그저 남남처럼 지나쳐 살아왔을 고림리 사람과 원삼 사람을 만나 가끔 함께 먹는 밥은 그렇게도 편하고 즐거울 수가 없다. 내게 용인은 냉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어 늘 그립고 편들게 되는 곳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용인시내에서도 버스를 타고 30분가야 도착할 수 있는 백암이다. 그러나 용인이 아닌 곳에서 만나는 용인사투리의 사람들은 굳이 ‘배개미’ 출신이 아니어도 고향사람이 된다. 태어나 평생 함께 할 친구들을 만났고, 꿈 많던 나의 학창시절이 저장되어 있으며, 나의 아버지와 엄마의 마지막 생이 기록되어 있는 곳, 그래서 용인사람을 만나면 같은 장소에 또 다른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이 앞선다. 그리고 이내 코끝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나이가 드나보다. 용인에 대해 추억할 것과 그리운 것들이 쌓여만 간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기억의 장소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그러나 120년 동안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