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룻렛 조희 식탁에 둘러앉은 다섯 사람 북극에선 빙하가 녹아내리고 터키는 땅이 갈라지고 일본 해변은 쓰나미가 휩쓸고 가고 하와이에는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한반도는 극한 호우에 잠기고 모두 치명적인 순서 약력: 2022년 『내일을여는작가』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산실 지원금을 수혜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괘종시계 이병진 어디에 눌러있어도 배꼽 맞추고 살 운명이다 팍팍한 삶일지언정 부부의 연緣으로 묶여 지내다 보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방향도 같은가 보다 종종걸음치는 살뜰함이 있고 천천히 따라가는 배려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길을 가고 말없이 따르고 술 취한 다음 날도 어김없이 제 할 일을 한다 촌각을 다투는 치열한 북새판에 시침과 분침이 엇길로 가지 않는 것은 작은 걸음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초침 앞에서 떳떳하고 싶은 까닭이다 또각또각 시간의 동맥을 따라 걷다가 지칠 무렵 때맞춰 가슴을 뛰게 하는 종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약력: 2022년「월간문학」신인작품상으로 등단 시집 「나는 폭이 없는 길을 간다」(2023), 「애매와 모호」(2026) 제22회 모던포엠 작품상(2026), 용인문화재단 예술지원창작지원 선정(2026)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모던포엠작가회 회원, 시야 동인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전문, - 『생활문화』 1946 . 2 약력: 미당 서정주(1915~2000)는 1936년 시 「벽」으로 등단해 『화사집』, 『귀촉도』, 『신라초』 등을 남긴 한국 현대 시인이다. 동국대학교 교수와 한국문인협회장을 지냈으며, 전통적 정서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약력: 김현승(1913~1975) 시인은 1934년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조선대와 숭실대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고독과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적 깊이를 탐구하여 한국 주지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가을의 기도》, 《눈물》, 《견고한 고독》 등을 발표하며 한국 서정시의 영역을 넓혔다.
환희 김윤배 새벽 산자락이다 거미줄에 이슬이 수없이 매달렸다 이슬마다 나무들이 들어있다 숲이 들어 있다 산맥이 들어 있다 바람이 들어 있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간 시집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등과 장시집 ‘사당 바우덕이’ ‘시베리아의 침묵’, 산문집으로 ‘시인들의 풍경’, 평론집 ‘김수영 시학’, 동화집 ‘비를 부르는 소년’ ‘두노야 힘내’ 등 다양한 저서를 펴냈다.
종 種 박설희 쓸쓸함과 막막함 사이에서 오늘의 물결이 닿은 곳 짝짓기를 거부해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는 땅거북, 외로운 조지 마지막 종種으로 남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주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는 우리 외에 지각 있는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외롭다 등의 메시지를 담은 금속판을 싣고 우주로 날아갔다 ‘외롭다’는 마음을 우주인은 이해할까 검은 우주 속 단 하나의 종, 지구인 긴 밥주걱처럼 생긴 부리를 물속에서 휘젓는 멸종위기종 저어새도 도무지 먹이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은 부리를 가진 나도 지구의 가장자리에 정박해 있는데 오늘도 난민처럼 지구 밖을, 별들을, 우주 너머를 기웃거리다 잠이 들 것이다 약력: 강원 속초에서 태어나 2003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을을 재다』,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 등이 있다.
듣는 사람 이시영 좋은 시인이란 어쩌면 듣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깊은 산 삭풍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재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조심조심 들을 수 있다 때론 벼락처럼 첨탐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어릴 적 볏짚 담 너머 키 작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끗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약력: 전남 구례 출생하였고,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제3회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지용 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개망초꽃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약력: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외 다수.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5개국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 석정시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노크 김은령 물 위에 앉은 꽃 무연, 무연히 바라보는데 못 전체가 수런수런 일렁거렸다 깊은 곳에서 수면을 치는 어떤 파동이 있었다 스스로 환한 꽃, 꽃! 둥근 잎 아래 누군가 살고 있어 그가 물 위로 건져 올린 자명등이었던 것 하령지에 와서 수련 구경하다가 찰방찰방 맨발로 걸어 들어가서 부유하며 잠든 연자를 깨운 그 주인공을 불러보았다 한 세계를 보이시는 당신 거기 계세요? 김은령: 경북 고령 출생. 1998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통조림』, 『차경』, 『잠시 위탁했다』와 불교 장편소설 『일연, 달빛으로 머물다』 등이 있다.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약력: 만해 한용운(1879~1944)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이자 평생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가, 승려, 저항시인이다. 1926년 한국 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인 시
탁본 수완 내가 네 안의 나를 볼 때 너는 내 안의 너를 본다 먹지로 탁본을 뜬 너와 나는 팔만대장경을 새긴 경판 전남 신안 출생, 1973년 출가 (해인사 등에서 정진) 1991년 『문학공간』 신인상 등단 현대불교문인협회 결성 계간 『불교문예』 및 『불교와 문학』 발행인 현대불교문학상 제정 및 운영위원장 (1996년~) 시집 『하늘 빈 마음』, 『이내의 끝자리』, 『향기는 아직 찻잔에 남았는데』, 『지리산에는 바다가 있다』, 『유마의 방』
검은 빵 윤희경 그날의 식탁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늘과 온기 사이, 내가 앉은 자리만 미세하게 움푹했다 나는 식은 국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혀끝의 작은 가시들이 들썩이며 마음의 밑바닥을 긁었다 입술을 떠난 말은 빛으로 번질 수 있을가 오래 씹을수록 질감이 돋아나는 검은 빵 목을 잠시 멎게 하는 단단한 결 묻지 않기로 한 울음이 빵 속에 숨어 있었다 먹다 남긴 하루 곁에 빵 한 조각이 굳어 있었다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 중에서 약력: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제10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제9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