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데 키리코 -사랑의 노래 영혼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나비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조향,「바다의 층계」부분)입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듯, 환상적이면서도 격렬한 이미지를 통해 무거움을 상징하는 기중기에 붙은 나비는 삶의 눈물겹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죠. 나비처럼 가벼운게 있을까요. 푸른 바다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순수자아를 찾으려는 나비의 목숨이 눈물겹습니다. 인간의 내면 풍경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며 ‘나비’와 ‘기중기’와 ‘푸른 바다’라는 대상을 통해 시인은 무의식의 창을 엽니다. 어느 한 곳 머무를 수 없는 바다에서 나비의 계절이 가고 있습니다. 문득, 사라진 나비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왜냐하면 기중기보다 가볍지만 목숨이니까요. 조르조 데 키리코는 그리스에 출생한 이탈리아의 화가로, 그는 형이상학화의 양식을 완성합니다. 몽환적인 그의 화풍으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네요. 키리코는 불가사의한 광경을 자주 그립니다. 일반적인 감각이나 경험을 초월한 것이었다고 하지요. 세잔은 인생의 무의미
폴 세잔 - 사과와 오렌지 쏟아지지 않고 붉은 손을 흔드는 별들은 천천히 어둠이 들어차는 밤은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지요. 별이 하늘의 몸을 밀어 상징처럼 떠오를 때 아가미로 숨 쉬듯이 침묵의 어두운 심층을 꺼내 봅니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박인환,「목마와 숙녀」부분)입니다. 나침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지금은 별을 바라보는 시간이에요. 별이 있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만듭니다. 반짝이는 별이 청춘을 찾아가는 소리가 먼 하늘에서 손에 잡힐 듯 들립니다. 별도 나이를 먹으니까요. 폴 세잔은 프랑스의 화가로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해 화면에 새롭게 구축해 나갑니다. 많은 풍경화와 정물화를 남겼지요. 세잔의 부친은 세잔이 공증인이나 관리인 등의 직업에 종사하길 바랐다지만 세잔은 꾸준하게 화가의 길을 걸어 나
고요에 귀를 대보는 깊은 발음 에두아르 마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박용래,「저녁눈」전문)입니다. 눈처럼 사라져 가는 어떤 기억을 형상화하여 슬픔을 분주하게 보여줍니다. 돌아갈 수 없는 풍경의 소멸은 애틋하고 스산한 풍경을 가득 몰고 옵니다. 시인은 사물들의 죽음이 지니는 적막의 공간에 자신의 자리를 방석처럼 깔아 놓는 듯해요. 이 시는 인간 존재가 가진 삶의 흉터들을 내면으로 끌어 들여 소멸의 운명을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삶에 내재한 죽음의 심연을 인식하고 극복하는 이상한 골목을 그는 만들어 냅니다. 천진한 믿음처럼 집들이 불을 켭니다. 목마른 세월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무너지면서 불빛처럼 그렇게 자라고 있나 봅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당시의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도 얼마든지 예술적인 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지요. 빛과 그림자에 중점을 둔 화가입니다. 《폴리 베르제
아름다운 꽃잎을 공중에 흩어놓을 때 - 르누아르<테라스의 두 자매> 온 힘을 다해 피었다가 지는 꽃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얹어 봅니다. 사라짐이 만드는 간절함이 모여 다른 시간을 불러 오고 있습니다. “사는게 꽃같아”라던 친구의 말이 생각나 꽃과 이별을 해버린 사람처럼 눈물이 나는 늦가을의 오후입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김소월, 「산유화」전문)입니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조용한 사람은 어떤 꽃을 잃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요. 바람의 운율로 몸 안에 들어왔다 사라진 꽃잎처럼 미세한 절망이 깊은 숨을 내쉽니다. 어떤 꽃은 떠나고 어떤 꽃은 남은 허공에 누군가 손바닥이 가만히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늘 인간이 잡을 수 없는 곳에 있지요. 꽃이니까. 봄의 아름다움을 활기 넘치는 색상으로, 젊음의 발랄함을 변화무쌍한 붓의 터치로 탄생시킨《 테라스의 두 자매》는 르누아르의 작품입니다. 르누아르는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
14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초월적 세계를 꿈꾸는 꽃나무에게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있오.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오.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오.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오.나는막달아났오.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런흉내를내었오. 이상의「꽃나무」전문 입니다. 벌판 한복판에 외롭게 서 있는 꽃나무를 보고 자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동 기술적 기법으로 표출해냅니다. 꽃이 만개해 있다고 하기도 하고, 꽃나무에게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네요. 이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미학을 비현실적으로 기술해 몽상적 세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지요. 허공이 자신의 허공을 가만히 만져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꽃나무는 꽃나무에게로 갈 수 없지요. 내가 나에게로 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세상의 풍경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본 화가가 바로 살바도르 달리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엿보이지요.《기억의 지속》은 녹아내리는 시계로 잘 알려진 달리의 작품입니다. 달리는 사물을 지속해서 응시하는 순간, 사물이 왜곡되거나 변형되는 기이한
물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절망의 노래 바람이 잘게 찢어지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시간입니다. 마음이 강가에 도착 했습니다. 저무는 가을 강 앞에 오래도록 서 있는 이유는, 공중에 무수히 생겨나는 삶의 바닥을 들여다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밤마다/ 내 가슴에 품겨서, “아프다, 아프다”고 발버둥치는/ 가엾은 새 한 마리.// 나는 자장가를 부르며/ 잠재우려 하지만,/ 그저 “아프다, 아프다”고/ 울기만 합니다.// 어느덧 자장가도/ 눈물에 떨고요.”(이장희,「새 한마리」전문)입니다. 울고 있는 새를 잠재우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대한 자신의 성찰이 아프게 그려졌네요. 쓸쓸하고 애달픈 심상을 함부로 토로하지 않았는데도, 눈물겹게 자장가가 이 세계를 울려요. 우리가 날린 자장가가 새의 영혼에 닿는 고독한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아침이 올 때 까지 자신을 돌아다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꿈의 자세로. 자장가가 새를 지나 아픔을 만지는 자세로. 프리다 칼로는 육신의 고통을 강한 의지로 극복하여 그림으로 승화시킨 작가지요. 그녀의 그림에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고통스러운 작품이 많습니다. 그림 대부분은 그녀의 통증에 대한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프리다는
밀레 - 이삭 줍는 사람들 참 많은 생명들의 수런거림 계절이 깊이 뿌리를 박는 땅 위, 숲이 더욱 울창해집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구원의 출구를 찾아 키를 키워가는 풀들도 무성해집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풀」부분)이 생각납니다. 풀의 꽃 같은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같이 울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을 떠올려봅니다. 그 숨결들로 당신이 피어나고 한 세계가 환해집니다. 성실하고 진지한 고백과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나면 벽이 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입니다. 우리는 오래 달려온 햇빛처럼 사물에 도착해 잠시 침묵해야 합니다. 바다와 숲, 그리고 대지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어쩌면 풀은 위대한 대지의 언어이기도 하니까요. 장 프랑수아 밀레는 농촌의 풍경과 생활을 그렸지요.「이삭 줍는 사람들」은 추수가 끝난 황금빛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의 모습입니다. 그림의 전면은 실제 농촌의 생활을 그렸고요. 배후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목가적
오키프 - 여름날 긴 여름을 우리는 끝없이 걸었지요 현대인에게 운명처럼 각인된 고독과 비애는,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눈이 있습니다. 고독하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김광균,「와사등」부분)입니다. 제 속에 슬픔의 음률을 품고 서 있는 창백한 진실의 이미지로 등불은 다가옵니다. 영원이라는 말을 발로 툭툭 차며 조용한 거리를 걷는 시인의 뒷모습을 봅니다. 인간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침묵으로 도시를 배회하는 쓸쓸한 정서가 선명한 이미지로 펼쳐집니다. 일상의 어느 결에서 문득 상처가 만져질 때 우리는 저녁의 불빛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게 되지요. 저 허구적인 불빛과 회색의 불안을 향해 깨어나듯이.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몇 번의 사랑과 몇 번의 몰락을 견디며, 우리는 어딘가로 걸어갑니다. 등불이 말해주지 않아도요.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을 사랑한 화가였지요. 자신이 보는 것. 그 대상이 의미하는 것을 크게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텅 빈 화폭으로 쏟아지는 무수한 심상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는 문장이 추운 겨울날 유리창에 기댄 고독한 개인을 연상시킵니다.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존재는 개인의 가슴속에 아프게 파고듭니다.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라는 마지막 문장은 새는 날아갔지만 인간이 지나가는 길섶마나 꽃이 피어나게 합니다. 꽃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죽지 않고 반드시 다시 태어나지요. 그런 형태의 몰락을 알면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폐허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꽃의 씨앗처럼 그리움의 기억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에 와 있는 듯이 혼잣말을 할 때면 꼭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것처럼.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유리창‧1」전문) 샤갈의 그림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개성이 강하게 표
어떤 날의 운수 -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가난을 사전적 의미가 아닌 결핍이라고 본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늘 가난합니다. “집이래야 남의 행랑방이었다./ 너무 조용하다./ 다만 어린애의 빈 젖 빠는 소리가 날뿐이었다./ 김 첨지는 목청을 있는 대로 내어 욕을 퍼부으며 발을 들어 누운 아내의 다리를 찼지만,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무등걸과 같았다./ 아내는 죽어 있었다.// ”(현진건,「운수좋은 날」부분)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김 첨지의 애환이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우리 현실에서 있을 법 한 이야기지요. 설렁탕이 먹고 싶다는 아픈 아내를 뒤로 하고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인력거꾼. 비가 추적추적 내린 그날은 김 첨지에게 운수 좋은 날이었지요. 아닙니다. 그날은 주검을 끌어안고 오열해야 했던 가장 비참한 하루였지요. 결말과 제목을 통해 이끌어낸 김 첨지의 하루가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장맛비처럼 흘러내립니다. 무수한 슬픔 안에서 우리는 소멸해가는 자신의 수의를 만져봅니다. 어떤 죽음 앞에서는 슬픈 삶의 얼굴을 만나게 되지요. 초승에서 그믐으로 거듭되는 삶의 마디마다 부침해가는 우리의 일상, 모든 사람은 어떤 정거장을 지나
코로 – 모르트퐁텐의 추억 보기만 해도 몽환적 풍경이 되어버리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윤동주, 「자화상」부분) 이에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심상을 통해 아픈 내면적 자아를 발견합니다. 자아에 대한 우물처럼 깊숙한 갈등과 고뇌,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내 앞의 풍경과 만날 때 문득 발밑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걸어갑니다. 이때 내면의 풍경은 낙엽에 무심코 투영되기도 하지요. 가늘게 떨리는 가지 끝에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의 길을 걸어갑니다. 무심한 여름밤은 길고 덥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 안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들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네요. 코로의 풍경은 자연이 가지는 고요한 리듬에 몽환적 온화함이 가득합니다. 나무의 그림자는 조용하고도 짙으며 빛이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바다를 오래 앓아본 자는 바다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자신인지 알게 됩니다. 내 안에는 고향을 떠나올 때 가슴에 담아온 아름다운 대천 바다가 아직도 시시각각 변하면서 존재하지요. 붉은 손바닥의 수면 위로 흘러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귓속말로 말해주던 일몰의 바다. 바다를 연습하며 나비 한 마리 살랑 살랑 바다를 날다가 사라지는 꿈을 자주 오래 꾸었지요.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김기림, 「바다와 나비」전문) 푸른 바다와 흰색의 나비가 시각적 감각으로 드러납니다. 푸른색의 동경과 흰색의 좌절이 충돌해 마침내 산화해 버리는 비극적 내면 풍경 이지요. 우리의 내일은 어떤 어둠을 털고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알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고통의 과정을 지나 새로운 하늘이 탄생한다는 의미이지요. 초현실주의 거장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새와 알이 자주 나옵니다. 하늘을 머금은 마그리트의 《대가족》을 바라봅니다. 거대한 새가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