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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감독 명배우 열전

[용인신문] 명감독 명배우 열전-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

1940년대 ‘만인의 연인’ 잉그리드 버그만

 

 

스웨덴 출신 ‘잉그리드 버그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여주인공 맡아 열연 스타덤

 

[용인신문]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은 스웨덴 출신의 배우로 175cm에 달하는 큰 키, 금발벽안(金髮碧眼)의 미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40년대 할리우드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대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비영어권 출신 배우가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사례는 그레타 가르보(1905~1990), 마를레네 디트히리(1901~1992)가 있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통산 아카데미 여자연기상 후보 지명 7회에 3회를 수상하고, 에미상 2회 수상, 토니상을 1회 수상했다. 그녀는 영화, TV, 뮤지컬 부문의 3관왕을 달성할 정도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그녀는 1939년 할리우드 버전의 <인터메조>를 ‘레슬리 하워드’와 공연하면서 미국 영화계에 입성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1941) 이후 변변한 출연작이 없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42년 대표작인 <카사블랑카>의 대성공으로 할리우드 톱스타의 위치를 구축하게 된다. 이어서 1943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동명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게리 쿠퍼와 공연하면서 독보적인 할리우드 대표 스타가 되었다. 1944년 ‘가스등’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45년 ‘오명’에 출연하면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 내리 3편의 여주인공으로 기용되었다.

 

이탈리아 영화의 네오리얼리즘 시대를 개막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를 보고 무작정 달려간 그녀는 당시 유부녀였고 로셀리니도 유부남이었다. 두 사람은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유럽에서 출연한 영화가 혹평을 받자 로셀리니와 이혼하고 1957년 할리우드로 복귀하여 <아나스타시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염문이 끊이지 않았으나 배우로서는 미모나 연기력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에 견줄 여배우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성기 시절 잉그리드 버그만은 은막의 여신이었고 클래식 영화팬들의 우상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