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윤석열 대통령은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 의중을 잘 들어낸 것이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말일 것이다. 말은 그 사람의 품성을 재는 잣대와 같은 거다. 말은 곧 법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말로도 읽힌다.
평생을 법가로 살아온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말이 함의하는 바는 크다. 고래로 훌륭한 용사는 힘을 자랑하지 않으며,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성내지 않으며, 적과 싸워 잘 이기는 사람은 함부로 다투지 않는다고 했다. 노자의 말이지만 훗날 진나라 영거량 때 상앙이 인용한 말로 더 유명해졌는데 그는 법가로 힘자랑도 없었고 성냄도 없었고, 다툼도 없었으나 천하가 그를 두려워했던 것은 법의 엄정한 집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법의 심판을 받는 일이 있었으니 곧 여론이 그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법을 뛰어넘는 인정은 있었으니 세상은 그것을 여론이라 했고, 요즘은 이를 언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론은 국민의 생각이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하고, 정치의 미미한 부분까지도 밝혀 시시비비를 따져주어야 한다. 그 감시와 펜 끝은 날카롭기가 추상같아야 한다.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이가 경계로 삼는다는 시경의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언론은 시사에 대한 격한 강개가 넘칠 수밖에 없어야 한다. 옛사람의 언론관은 분명하다. 말의 책임은 화자인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자인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비롯한 정치인에게 있다는 말이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나라가 편안하면 근심하는 국민이 없는 법이다. 근심하는 국민이 없으면 나라가 시끄럽지 않은 법이다.
나라는 시끄럽고 다수의 국민은 근심 가실 날이 없다면 이는 정치가 국민 생각에 미치지 못해서이다. 정치란 입으로 말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불치하문이라 했다. 모르면 낮은 이에게라도 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위로의 말이다. 물론 대통령의 자리는 묻는 자리가 아니라 답을 주는 자리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서 충분하게 준비된 후 용상에 올랐다. 세습에서 살아남는 길은 어떤 물음에도 답을 줄 수 있는 임금이 되는 길이 유일이다. 그럼에도 임금으로서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었다. 임금의 권위는 말 한마디면 신하의 목숨쯤은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도 목숨 걸고 직간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홍문관 교리를 비롯해서 사간원과 사헌부가 그것이다. 이를 삼사라 하는데 수장은 정3품 벼슬의 대사간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임금에게 직언을 고하고, 간하는 게 일이다. 임금의 전횡과 오류를 막는 일이다. 그러라고 나라에서 녹봉을 주는 거다.
윤석열 대통령 주변에 직을 걸고 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못 들어 봤다. 개는 주인을 위해 짓기도 하지만 주인을 위해 함부로 짖다가 되려 주인을 욕보이기도 한다. 이쯤에서 지방언론이라 할지라도 외쳐야 한다. 그것이 쇠귀에 경 읽기로 그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