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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가정의 화평을 종훈으로 실천해 온 명가

조선개국 공신 여진족 툰드란의 후손들
용인엔 송계공 후손 수민이후 정착한 듯

   
 
청해이씨는 조선개국 공신 이지란의 후손들
청해이씨는 조선 개국시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된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청해백 이지란은 본래 여진족(女眞族)으로, 툰두란으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 아라부카[阿羅不花]는 여진(女眞)의 금패천호(金牌千戶)였다. 툰두란도 아버지에 이어 천호가 되었다. 원(元)나라 말기, 고려 공민왕 때 많은 부하를 이끌고 귀화하여 북청(北靑)에 거주하였다.
툰두란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으로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았는가 하면, 이름도 지란(之蘭)으로 호칭하였다. 조선개국공신 1등급으로 책록된 작호(爵號)도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청해는 북청의 다른 이름이다.
지란의 아들 화영(和英)은 세종 때 우군부판사(右軍府判事)에 이르렀고, 9세손 인기(麟奇)는 선조∼인조대에 벼슬하여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이밖에 인기의 아들 중로(重老), 중추부첨지사 핵의 아들 유민(裕民),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수민(壽民) 등이 많은 공적을 세워 유명하다. 청해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3700여 호에 1만 2000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7세기 초에 용인에 입향한 청해이씨 송계공파 후손
청해이씨(靑海李氏) 가운데 용인에 정착한 후손들은 이인기(李麟奇)를 중시조로 모시는 송계공파(松溪公派)이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처음 입향한 이는 송계공의 손자인 9세손 문주(文柱)이다. 청해이씨 송계공파의 후손들이 처음으로 이동면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초이다.
9세손 문주(文柱), 10세손 허( ), 11세손 수민(壽民) 등의 묘역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도통제사를 지내고 병조판서에 추증된 수민 이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많다.
용인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자세하지 않으나, 선조들의 묘역을 관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동면에 정착하게 되고, 점차 각지에 분산해서 살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용인 각지에 분산해서 300여 년간 대를 이어 오고 있다.
이동면 묵리 굴암동에는 이문주, 이수민, 이효강 등의 묘역과 묘갈이 있으며, 이수민의 신도비도 현전한다.
9세손 문주(文柱:1599-1662)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승지에 추증된 명로(明老)의 아들이다.
작은 아버지 중로(重老)를 도와 인조반정에 참여하였으나 공신에 녹훈되지는 않았다.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강도에 이르렀으며, 이 공로로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이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11세손 수민(壽民:1651-1724)은 조선 후기의 무장(武將)이다. 선전관 허( )의 아들이다.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 도총부도사, 고원군수, 낙안군수, 장흥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전라병마절도사에 임명되고 삼도통제사로 승진하였다. 1719년에는 어영중군으로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신임사화로 유배되는 노론의 영수 김창집을 호행(護行)하였다는 이유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제주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영조 때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때 용인의 굴암동으로 장지를 옮겼다.

청해이씨 후손이 적은 이유는 일부일처제를
고집한 때문
청해이씨 송계공파의 후손들은 용인에 17세기 초에 입향하여, 이후 3백년간 용인지역에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씨처럼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동면 어비리에 한때 많이 거주했다는 후손들의 증언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이다. 지금은 용인 각지에 분산해 살고 있다.
총무 이주용씨에 의하면, 용인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아이들까지 합쳐서 2백여 명 남짓 된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이동면 묵리 굴암동 묘역에서 시향(時享)을 올린다.
청해이씨 문중의 족보를 보면, 다른 문중에 비해 양자를 들여 대를 이은 사례가 현저하게 많다. 조선조의 사대부 가문에서 가문의 번창을 위해 부인을 두세명 두었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청해이씨 가문에서는 후실을 둔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한다.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면,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왔던 것이다. 여러 대를 걸쳐 이같은 일이 계속되면서 가문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된 것이다. 자손이 귀하더라도 가정의 화평을 더 중시했던 선조들의 덕망을 후손들은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청해이씨 후손들이 적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청해이씨 송계공파 후손 가운데 저명인사로는 성재(전 초등학교장), 제환(국제변호사), 제권(전 신한은행 지점장) 등이 있다.
<글·홍순석(강남대 교수) | 사진·서정표(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