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울한 봄날 아침이었다. 인사동에서 마신 밤샘 술을 이기지 못하여 허청이며 낙원동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근처 낙원탕에서 갓 나온 듯한 여인이 목욕 대야를 낀 채 흘낏 나를 돌아본 뒤 청바지에 긴 생머리를 찰랑이며 나비처럼 경쾌하게 앞서 가고 있었다. 처음 본 여인이었다. 무심코 따라가 보았더니 낙원약국을 돌아 탑골 안으로 쑥 사라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컴컴한 탑골 문을 열었더니 거기 어둑한 홀을 향해 열어젖힌 안방 벽에 한 낯익은 윗도리가 걸려 활짝 우고 있었다. 송기원의 것이었다.
음울한 봄날 아침의 풍경은 음울하지 않다. 젊은 날의 초상이며 풍경이기도 하여 즐겁다. 지금은 밤샘 술을 마시는 풍속도도 사라졌다. 술 취하지 않는 시인들이어서 메마른 시단이기도 하다. 이 시는 참으로 오래되어서 유쾌한 그림 한 장이 떠오르는 시이다. 이시영 시인과 송기원 작가는 죽마고우이며 대학동기이며 술친구이다. 그날, 그러니까 인사동에서 밤샘 술을 마실 때 분명 송기원 작가도 함께 있었을 터이다. 이시영 시인이 밤샘하는 동안 송기원 작가는 술집 <탑골>로 스며들어 거나했을 것이며 탑골의 여인과 함께 밤을 보냈을 것이다. 안방 벽에 걸려 활짝 웃고 있는 낯익은 윗도리, 그것이 송기원 작가의 것이어서 이시영 시인은 더욱 음울한 봄날이었을 것이다.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