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글씨가 사람을 평가하던 시대가 있었다. 글씨는 바른 글이라 하여 ‘해서’를 으뜸으로 친다. 선비로서 서예가가 아닌 오로지 문장의 글씨체. 해서체로 일가를 이룬 인물을 꼽는다면 미수 허목이 지존이다.
노년의 우암이 몸에 고질병이 들어 노복을 보내어 정적 미수에게 처방전을 부탁했다. 미수는 어디를 가던 길이라 노상에서 선채로 걸으면서 노복에게 우암의 병증을 듣는대로 처방전을 써준다. 왼손바닥에 갱지更紙를 놓고, 오른손으로 붓끝을 잡고 팔꿈치가 닿지 않은 상태에서 걸으면서 약방문을 써서 건네주었다. 노복으로부터 약방문을 받아든 우암은 갱지 글씨가 워낙 빼어난지라 미수가 집 서안에 앉아 쓴 줄 알고 안부를 물으니, 노복으로부터 약방문 쓴 경위의 전후 사정을 듣게 된 우암은 원본은 자신의 옷 소매 속에 넣어두고 필사본을 써서 노복에게 주어 약을 지어오게 했다 전한다.
글씨가 그만큼 빼어났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바른 글씨 써내기란 여간한 것인데 미수가 그것을 해낸 것이다. 이른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걸으면서 쓰되 점이든 삐침이든 파임이든 단 한 획이라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글씨. 그런 글씨를 우암은 생전에 본 것이다. 우암은 어려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해서체로 수신을 삼아온 인물이기에 어지간한 필력으로는 우암의 눈에 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면에서 미수는 우암보다 몇 수 위였다. 미수가 정계에 늦게 나온 연유가 글씨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글씨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무얼 해도 바르지 않다는 게 미수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단정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빼어난 글씨다. 가끔 이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의 당대표 등이 대전 현충원 방명록에 남긴 글씨가 회자 될 때가 있다. 현충원 참배 못지않게 방명록에 남겨진 글제와 글씨체는 쓴 사람의 정치철학을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정치사이다. 고래로 정치인과 관료는 어려서부터 소양 교육이라는 게 있다. 소는 지적함량을 뜻하는 학문으로 곧 문사철이고, 양은 그것을 제술해 낼 수 있는 붓글씨 서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뼈아프게 들리겠지만 소양 교육이 안 된 자는 그 세계에 발을 디디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