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경(詩經) 상서(庠序) 관저에서 말한다. 언자무죄(言者無罪) 문자족계(聞者足戒). 설령 틀린다 해도 말하는 이는 죄가 없나니, 듣는 이가 경계로 삼으면 된다는 말이다. 국민들이 허기가 져서 사는 게 힘들다고 원성이 자자하다면 여기에 대한 책임은 응당 정치인이 져야한다. 정치란 승패를 다루는 점에서는 전쟁과 같지만 실질적인 면에서 정쟁이다.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 정쟁이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은 전쟁이다. 그래서 정치는 정쟁은 될 수 있어도 전쟁까지 이르러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는 전쟁이다. 국민의 눈에 비친 정치인들의 행태는 영락없는 퇴로를 막고 섬멸해야 할 ‘적’ 이라는 점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로에게 겨눈 총구는 빠르게 도륙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민의 행복 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자신의 배부름과 제 가족 등 따숨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본래 대통령과 집권여당이란 나라의 규모가 크고 작음을 떠나서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다. 그 권력에 준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파하는 국민은 치료해주고, 배고파하는 국민은 배부르게 먹여주고, 징징대는 상대 당에 대해서는 배려가
[용인신문] 정치란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정치는 정쟁까지는 할 수 있어도 전쟁까지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누군가가 반드시 죽어 나가야 끝나는 곧, 이긴 자가 진자를 죽여야 속이 시원한 전쟁의 시대로 돌아갔다. 지금은 아얏 소리도 못하는 이정현이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흔히들 탄핵 대통령 박근혜의 복심으로 불리는 그런 자였는데 그가 한창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없고 뭐라도 된 양 안하무인격으로 나설 때 이런 말이 뉴스에 떴다. “내손에 장을 지진다.” 그러나 우문인지 몰라도 손가락에 장을 지졌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다. 요즘에는 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께서 느닷없이, 그것도 뜬금없는 죽을 각오로 단식 투쟁을 한다고 한다.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산같이 많은 이때에 한가롭게 밥이나 굶겠다니 물론 죽을 각오까지는 할 수 있다. 그보다 더한 각오인들 못하랴마는 문제는 실천이다. 전에 김 아무개의원인가는 뭐가 그리 억울했던지 씨도 안 먹히는 일로 단식투쟁 어쩌고저쩌고 하며, 눈먼 강아지 지푸락 잡아당기듯이 호들갑 떨었다. 혹자가 보기에 그런 모습이 오죽 꼴사나웠으면 툭 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테러
[용인신문] “신하인 탕이 천자 걸을 추방했고, 신하인 무왕이 천자 주를 토벌했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며 제나라 선왕이 물으니 맹자가 “옛 문헌에 그렇게 쓰여는 있지요.” 라고 답한다. 그러자 선왕이 의아해 하며 이렇게 말한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여기서 맹자는 군주필부론을 펴는데 인을 해치는 사람을 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사람을 잔殘이라 하는데 잔적한 자를 일개 필부라 말하지요. 일개 필부인 주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요.” 양혜왕장구하8문장의 이 기록은 군주라도 군주 노릇 제대로 못하면 필부로 죽어갈 수 있다는 그 옛날 호랑이 담배 물던 시대에도 그 정도는 했다는 말인 셈이다. 불과 몇 해 전 우리는 국민의 힘으로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그 이면에는 국민을 위해 써달라고 부여한 권리를 올바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인 것이다. 임금과 신하 위 아래가 각각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출발점이라고 맹자는 명토박는다. 어떤 정치인이 있었다. 맹자가 “지역구를 돌봐야하는데 지역구는 버려둔 채 중앙 정치판에 가서
[용인신문]촛불 광장 정치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집권 반환점을 돈 지금의 시점에서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서울대학교 교수이던 조국이라는 인물을 등용하면서부터이다. 훤칠한 키의 서울대 법대 출신에, 서울대 법학교수의 신분인 그는 기성세대에 대한 약자의 편에서 그야말로 약자가 듣고 싶어 하는 대목만 때로는 칼럼으로, 때로는 강연장에서의 현란한 수식어로 아픈 청춘의 상처들을 시원하게 도려내주었다. 물론 그때 했던 그의 말과 행동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비수가 되어 자신의 인생에 발목을 잡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조적조, 즉 “조국의 적은 조국이다.”라는 신조어까지 낳게 된다. 어쨌거나 그는 지식인이 갖기 쉽지 않은 행보로 인해 수감까지 되는데 속칭 사노맹 사건이 그것이다. 그야말로 저쪽 반대편에서 보면 억 소리 하고도 남을, 온몸으로 실천해가는 그의 삶은 그가 주는 중량감이 결코 녹녹치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그런 그에게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학내에서 영문과에 재학 중인 정경심 교수를 만나고 부터였고, 여자 쪽에서 더 적극적이었다고 하니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으랴. 조국의 첫사랑은 그렇게 결실을 맺는다. 남자의 삶에서 첫사랑
[용인신문]계씨 집안의 7대 영주였던 계환자의 아들 계강자는 정치 입문 10년이 흐른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정치 동지인 60세에 이른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는 “정치란 바름이다<政者 正也>. 네가 바름正으로 솔선한다면<자솔이정子帥以正. 솔帥은 ‘장수 수’로 읽지만 때론 ‘본보기 솔’로 읽는다.>누가 감히 바르게 행하지 않으랴<숙감부정孰敢不正. 논어 안연편顔淵篇17>”고 말했다. 계강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공자는 사족을 단다. “네가 바르면 백성들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고, 네가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은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자왈子曰 기신정其身正 불령이행不令而行 기신부정其身不正 수령부종雖令不從논어子路6>. 그러면서 천하에 위衛나라 영공靈公처럼 쓰레기 같은 자가 또 있으랴”라며 분개하니<논어 헌문편> 계강자가 대꾸하기를 “그럼에도 위 영공은 임금 자리는 잘도 유지하지 않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한다. “중숙어는 외교를 잘해 무역이 흥하고, 축타는 종묘를 제대로 이끌어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왕손가는 군대를 잘 다스려 국가가 평안한데 임금 자리를 누
[용인신문]예수님이 목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 테크톤(tekton)은 실제로는 돌을 다루는 석수에 가까운 단어다. 이스라엘 산에는 나무가 없다. 당시 건축물도 대부분 돌로 된 것을 미루어볼 때 예수의 공생 이전 직업은 나무를 다루기는 하지만 나무만 다루는 전문적인 목수가 아니라 나무와 돌을 모두 다루는 석공이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추측하건데 돌을 다루는 예수의 삶은 꽤나 힘겨웠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은 그래서 더욱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동감과 공감을 이끌어 냈는지도 모른다. 무거운 삶에 지친 배고프고 가난한 저들은 그런 예수의 말에 마음을 열고 따르기에 이른다. 어떤 이는 이런 예수를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자들이 있었으니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밤중에 끌고가 심문을 한다. 주범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 현 대제사장이며, 산헤드린 공회의장 가야바이다. 산헤드린 공회 법규에는 해가 뜨기 전에는 공회를 소집할 수도 없으며, 어떤 종교적인 죄인도 밤중에 심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밤
[용인신문]인정하기 싫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늘 알 수 없는 슬픔이 존재한다. 오죽하면 가난한 사람은 여름도 춥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누구에게나 삶이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한 사람이 타인의 삶을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먼 길 가는 나그네가 길바닥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는 길이 험해서가 아니라 힘겹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삶이 흘러가는 대로 몸만 맡겨두면 되겠지만 저들에게 흘러가는 그것이 내게도 있었다면 우린 절대로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엄마는 왜 그렇게 사냐고. 엄마가 답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이렇게 사는 거라고.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숟가락이 존재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그것이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그냥 살기만 하면 되지만 누구는 살다 못해 견디고 버텨 봐도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 대한민국은 금수저들이 서로 잘났다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중에도 흙수저들은 먹고사느라 슬퍼할 틈도 없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하고 자공이 묻자, 공자가 “당연히 있지.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말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사람을 미워하며, 용맹
[용인신문]조국 발 문재인 정권 퇴진을 외치며 제1야당의 당수 황교안 대표가 삭발이란 이름으로 반 삭발을 했다. 본래 삭발은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인생의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한 마지막 저항이다. 그 저항 끝에는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절박했기에 거기에는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무소속 이언주 의원으로 시작된 박인숙 의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로 이어지는 릴레이식 삭발이 주는 국민적 동의어는 쇼!쇼!쇼!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안이 절박한 투쟁일수록 거기에 걸 맞는 선행 조건이 요구된다. 예를 든다면 존비속 친가 외가 양쪽 모두 3대에 걸쳐 모은 전 재산을 문재인 정권 퇴진 운동에 내 놓는다는 전제하에 삭발을 감행 했다면 국민적 감동은 ‘아. 저건 진짜구나’ 에 방점이 찍힐 수 있다. 그런데 내 돈은 아까우니까 단돈 100원도 안 내놓으면서 돈 한 푼 손해나지 않는 삭발을 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더군다나 맨살이 훤히 드러나는 완전 삭발도 아닌 그냥 삭발 흉내만 내는 정치적 의도가 물씬 풍기는 반 삭발에 공감할 국민이 과연 몇이나 있으랴. 국민은 당
우농의 세설 어디서 뭘 하든 일제 강점기 때 고문으로 사지가 절딴 난 사람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님이시다. 그의 아호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 고문당해 앉은뱅이 됨)에서 보듯이 그는 앉은뱅이다. 조선총독부를 향해 눈길도 줘서는 안 된다며 총독부와 반대 방향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만해 한용운님이시다. 심산처럼 고문을 견딜 수도 없고 만해처럼 집을 돌려지을 만치 강단도 없기에 난 죽을 때까지 일제에 허리를 숙이지 않으리라며 선 채로 세수를 했던 이는 단재 신채호님이시다. 이 세분을 일러 세상은 일제 강점기 3절(三節)이라 불렀다. 대한민국 땅에서 숨을 쉬고 사는 모든 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정부분 이분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음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시에는 음풍농월이 없고 오직 우국충정뿐이다. 어찌 이 땅엔 3절만 있으랴.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수많은 우국충절의 선비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그중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9.8) 선비를 비껴 갈순 없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대사성을 지낸 이휘준(李彙濬)의 둘째 아들이며, 고종3년 1866년 약관(25세)에
우농의 세설 린획(麟獲)은 양날의 검 BC481년 노 애공 14년 공자는 71세 나이에 춘추를 썼는데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잡혔다. 서수획린(西狩獲麟)은 소식을 듣자 춘추 책을 기린 잡은 데서 멈추다(春秋止于獲麟)로 맺는다. 이 문장은 훗날 처세술의 경책으로 회자된다. 사람이란 이기적이어서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다. 그 약함 속에는 욕망이 이성을 이김을 내함(內含)한다. 영웅은 공부하지 않지만 남 밑에 있으려면 배워야한다.(英雄不會讀詩書 取而代之 水湖志)필요하면 아버지처럼 모시고 필요 없을 땐 후레자식처럼 버리는게 세상인심이다. 남 밑에 오래 버티려면 네 권의 책이 필독이다. 비문, 마지, 한해, 당송(非天.馬地.韓海.唐宋). 한비자의 글은 하늘의 그물망 같고, 비천(非天) 사마천의 글은 땅과 같고 마지(馬地)한 퇴지의 글은 바다 같고 한해(韓海) 당송의 시는 사람을 움직인다. 이인(移人) 본래 당시는 77명의 시 311수이나 장섭(章燮)이 당시삼백수주소(唐詩三百首註疏)를 달면서 11수를 첨하여 321수가 전한다. 와신상담의 패자 월왕 구천이 복수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짓된 행동으로 진실을 숨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식은 수단이고 책략이다. 업을 이
우농의 세설 세월호 때는 몇 장의 손수건을 적시셨나요? 공문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시예락(詩禮樂)이다. 논어 태백(泰伯)에 자왈 흥어시하고 입어례하며 성어락하라(子曰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시로 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예로 일으켜진 마음을 세우고, 음악을 통해 완성한다. 공자는 아들에게 과정지훈(過庭之訓)을 하는데 시와 예다.논어계씨 공자는 왜 아들에게 시와 예를 배우라 했을까. 시를 모르면 남 앞에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고, 또 예를 모르면 말은 고사하고 남 앞에서 설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모든 시는 시경에서 출발한다. 본래 시경은 운자에 구애됨이 없는데 비해 네 글자로 되어 두자에서 끊어 부르는 노랫말이다. 여기까지가 고체시이고, 이것이 당대 두보(杜甫)에 이르러 근체시로 절구와 율시와 배율, 그리고 대구 운자로 체계화된다. 다섯 글자 네 줄씩 여덟줄 혹은 일곱 글자 네 줄씩 여덟줄 이를 오언절구 율시. 칠언절구 율시라 하는데 본래는 여섯 자, 여덟 자로 짓는데 한 글자를 뺀다. 이를 허사(虛辭)라 하여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시어(詩語)다. 한시를 지을 때는 오언시이나 여섯 자로 짓되 쓰기는 다섯 자를 쓰고, 칠언시이나 여덟
우농의 세설 가장 오래된 인문학 태교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인간은 선(善)하다. 그런데 차성(次聖) 순자(荀子)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다. 그 뒷말이 반전이다. 교육하면 악인도 선해질 수 있다. 그리고서 나온 말이 빙생어수한우수 청출어람청어람(氷生於水寒于水 靑出於藍靑於藍)이다. 얼음은 물에서 생겼지만 물보다 차고, 푸른빛은 쪽풀에서 나왔지만 쪽풀보다 더 푸르다. 순자권학(荀子勸學) 이 말에 대한 해석은 극과 극이다. 본래 이 말은 전별 어인데 앞에 문장은 이사에게 준 글이고 뒤 문장은 한비에게 준 글이다. 달변가 이사는 인간의 본질은 악하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해 나가고 말더듬이 한비는 인간의 본질은 악하긴 하나 마지막 하한선에 규칙을 세워 인간의 바닥을 보지 않게 하자는 것이 한비철학의 법치다. 위의 두 문장은 자신들의 성격을 조심하라는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자경(自警)의 잠(箴)이다. 결국 이사는 물보다 더 찬 얼음 같은 냉혈한으로 인생을 살다가 저자거리에서 아들과 함께 허리가 잘리는 비명횡사를 했고, 한비는 그토록 보기를 원치 않았던 인간의 바닥을 동문인 이사에게 본다. 결국 이사의 집에 마련된 사설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