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역병(疫病) 코로나19의 창궐은 확진자가 7000명을 넘긴 시점에서 국민들에겐 분명 불안을 넘어선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이다. 이쯤에서 대한민국 도시는 코로나19 창궐로 그 기능이 마비되어가고 있는 중이고, 모든 국민은 1회용 마스크 한 장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사화(士禍)를 훨씬 능가하는 재앙(災殃)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국제적으로는 천하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봉쇄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심에 역병의 슈퍼전파자로 주목받고 있는 종교단체가 있으니 한국기독교단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교회가 그들이다. 보도된 이만희 교주의 말을 빌면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 짓이라며 말씀과 믿음을 지키자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의 것이다<요 11:25-27>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다. 또 보도에 따르면 전염병 방역이 심각 단계로 올라간 날 한기총 회장 전광훈 목사는 광화문 광장에서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코로나여 물러가라.” 저들의 뜨거운 믿음을 폄훼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
[용인신문] 군주의 나라에서는 백성이 가난하거나 생활이 궁핍하거나 굶주리면 오롯이 군주의 책임이다. 군주가 무능하여 생긴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군주는 백성을 잘살게 해줘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기원전 209년 쯤 머슴을 살던 어떤 사내가 느닷없이 서너 개월 동안 왕 노릇 하다가 목이 잘려 죽어나간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됐는지 뭘했는지 까지는 알지는 못해도 그가 했다는 말 쯤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사즉거대명이死卽擧大名耳’가 그것이다. 풀어보면 죽을 때 죽을 망정 이름 정도는 크게 떨쳐야 되지 않으랴. 그러면서 천고의 경책을 남겼는데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가 그것이다. 말인즉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으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눈알을 부라리며 외치는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군 진승陳勝의 절규에 900여 명의 오합지졸 무지렁이 농민 반란군들은 분기탱천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사기 진섭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처자식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 눈알이 뒤집히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군주의 나라에서도 백성의 가난에 대해서 만큼은 이렇게 책임을 지거늘 천지개명한 이 시대에 국민이 선출한 민선투표의
[용인신문] 맹자 양혜 왕 장구하편에 “우리 임금님은 음악을 좋아 한다면서 어찌해 백성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는가?”라는 아찔한 기록이 나온다. 고대시대에 있어서 지도자가 음악을 듣는다함은 음악을 통해서 조화로움을 배우기 위함이요, 그 조화로움은 백성들의 삶에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모자람도 더함도 없는 고른 은덕을 끼치기 위함이다. 곧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심층적 검증을 거친 자만이 백성을 이끌어갈 위치에 있어야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을 더 쉽게 풀어쓴다면 세종대왕의 국리민복(國利民福) 제 1항인 ‘백성에게는 밥이 하늘이고, 임금에게는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말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곧 윗사람 아랫사람 서로 뜯어가려는 상하교정(上下交征)이 아닌 함께 즐기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이다. 세종대왕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여민가의(與民可矣)를 말하면서 백성을 위함에 삼민(三民)을 말했는데 여민(與民) 위민(爲民) 애민(愛民)이다<세종실록 재위12년 12월20일>. 여민이 됐건 위민이 됐건 애민이 됐건 자구의 해석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방점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함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왕께서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신다면 정
[용인신문]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정치라는 것은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너만이라도 바르게 살면서 이끈다면 어떤 백성인들 감히 바르게 되지 않겠는가.” 고 말했다. 논어 안연 편 17문장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자 19문장에서 계강자가 또 묻는다. “만약에 무도한 자를 죽여서 도를 실천하는 건 어떻습니까?” 공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보면서 말한다. “정치를 한다면서 왜 살인을 말하는가?” 이 문장의 방점은 18문장에 있다. 정치한다고 나대는 너만 바르면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라고 고사를 지내도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는 말로, 정치하는 자들만 바르게 산다면 백성들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루어진다는 말이다. 다산은 이를 이렇게 풀었다. 정치는<政也者> 바름이고<正也> 백성을 균등히 잘살게 하는 것<均吾民也>. 여유당전서 원정原政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늘 자기 개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개는 자기<己>를 쳐서<攵> 고치는<改> 것이고, 혁革은 개가죽을 벗겨 뒤집는 것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본래 政이라는 피정의항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용인신문]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림에 백성 중에서 고요를 들어 쓰니 나쁜 자들이 멀어졌고, 탕 임금이 천하를 다스림에 백성 중에서 이윤을 들어 쓰니 나쁜 자들이 멀어졌다.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선거選擧라는 말이 나왔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다스림의 요체에 대해서 말하길 물의 근원을 막는 자 목이 마를 것이며, 근원을 등지는 자는 몸이 마를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라의 근원인 백성을 막아도 안 되고, 등져도 안 된다는 말이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조조의 대군을 피해 신야 성을 떠나면서 따라오는 백성들 때문에 도망하는 길이 지체가 되니 익덕장비가 말한다. 백성들은 버려두고 우선 급한 대로 우리 몸만 먼저 피하자 하니 유비가 큰일 날 소리라며 언성을 높인다. 백성을 얻는 자 흥할 것이고, 백성을 잃는 자 망할 것이다. 돼먹지 못한 자가 일시적으로 민심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자는 머지않아 민심으로부터 심판을 당한다는 게 맹자가 주는 경책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의 마음을 얻는 자가 곧 치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백성의 마음 곧 민심득천하의 길은 오직 한길. 투표로 결정짓는 선거가 유일이다. 노자老子의 제자 계연計然신견辛銒은
[용인신문] 치자治者의 덕목에는 삼계三戒와 삼외三畏가 있는데 논어 계씨편 7문장에서는 경계할 세 가지를 일러 색, 시비, 돈이라 한다. 두려워 할 세 가지는 예기 잡기 하편에 의하면 이렇다.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함을 두려워해야하고, 백성의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하고, 기억했음에도 실천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명토 박는다. 계씨편의 삼계는 수신의 문제요, 예기편의 삼외는 덕목의 문제이다. 치자는 내적으로는 수신이 되어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덕목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政治는 문자 그대로 바른 다스림이다. 바를 정正에 칠복攵이 더해져 이루어진 정政은 남을 매질을 해서라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매로 쳐서 바르게 한 다음 백성을 다스리라는 말이다. 정치는 어려운 게 아니다. 그저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해서 백성의 본이 되면 되는 것이다. 계강자가 “어떻게 해야 백성이 따르겠습니까?”하고 물으니 공자는 말한다. “너만 잘하세요. 그러면 백성은 저절로 따릅니다.” 여기서 유명한 숙감부정孰敢不正의 고사가 생겨났다. 물론 정치는 도덕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가 국민을 더 위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용인신문] 세례요한의 죽음은 믿음을 떠난 목회자의 현주소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쓰는 방향이 달라서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 이를 용지소추중적덕用之所趨重積德이라 하는데 죽음을 쓰는 방향에는 살면서 거듭 쌓아 온 덕이 있어야 죽음 또한 태산보다 무거워진다는 말이다. 용지소추는 사마천의 말이요, 중적덕은 노자의 말이다. 갈릴리 지역과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는 본명이 헤롯 안티바스라고 하는 분봉왕 헤롯은 헤롯대왕의 10명의 아들 중 첫째다. 그는 미망인 이혼녀 헤로디아와의 관계로 세례요한의 질타를 받았고, 세례요한은 그 일로 목이 잘려 머리는 쟁반에 들려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당시 헤로디아는 삼촌인 헤롯2세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반역죄로 죽자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있는 둘째 삼촌 빌립에게 시집가서 살로메라는 딸을 낳고 이혼했다. 이에 헤롯의 입장가로 법률적 잘못은 없음에도 요한은 모세 율법을 들어 가열 차게 책하는 것으로 사역 후반부를 낭비한다. 그로인해 메케루스 감옥에 1년이 넘도록 갇히면서 믿음 또한 바닥을 드러내는
[용인신문] 초나라 소왕昭王때 정치현실이 몹쓸 극에 달하자 스스로 미친척하며 살던 본명이 육통陸通인 광접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가 초나라 국경에 이르자 그가 탄 수레 옆을 지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중 한 대목은 이렇다. 지난 일을 말해 뭣 하랴(왕자부가간往者不可諫). 오는 것은 그나마 따를 수가 있질 않은가(내자유가추來者猶可追. 논어 미자微子5). 이를 중국 동진시대 사람 시인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다시 풀어낸다. 이미 지나간 잘못을 탓할 수 없음을 깨닫나니(悟已往之不諫)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뭔가를 해볼 수 있음을 알았노라(知來者之可追). 이를 조선시대 문인 장유는 ‘갑인 년 섣달그믐 밤의 감회’(甲寅除夕有感)라는 글에서 지난일은 뚝 끊어버리고 앞일만 가지고 다시 풀어낸다. 앞날은 그래도 어찌할 수 있으니(래자상가추來者尙可追) 이제부터 모쪼록 다시 시작하리라(자차수갱시自此須更始장유張維계곡집谿谷集25권). 그렇다. 이미 지난일 묻고 따진들 뭐 어쩌겠는가. 장유가 이글을 쓸 때가 1612년 26세때 김직재金直哉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으로 고향인 경기도 안산安山에 은거한지 3년 되던 해 섣달그믐 밤 새해를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으로 쓴 글이다. 어려
[용인신문] 섭 땅의 백성들이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이웃나라로 일자리를 구해 떠나는 일이 잦아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백성이 줄어드는 탓에 세수가 적게 걷히자 섭 땅의 군주 섭공葉公은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공자가 지나간다고 하여 한달음에 공자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말하며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이 물음이 꼭 백성만을 위한 물음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 공자는 한 자락 깔고 답한다. “나라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즐겁게 살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먹고 살기 위해서 나라밖으로 멀리 떠나지도 않을 뿐더러 떠난 백성들도 저절로 돌아올 것이다.” 섭공은 탁견이라며 공자일행을 후히 대접한다. 관자 목민 편에 정치가 흥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따르는 데에 달려 있고, 정치가 망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거스르는 데에 달려 있나니 백성들은 가난을 두려워하고 천하게 사는 것을 싫어한다. 군주 된 자는 이를 살펴서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줘야 하며, 나아가 근심 없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을 마련해 주어야한다. 이것이 군주의 일이다. 그러면서 사족을 단다. 백성들을 먹고 살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들은 군주를 위해 죽을
[용인신문] 윤석열을 임명할 땐 언제고 이젠 윤석열을 잡겠다며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법치 국가에서 법을 쥔 자들은 그야말로 갑중에 갑이다. 법을 기준으로 두 개의 깡패가 있다. 법위에 있는 깡패와 법아래 있는 깡패. 세상은 이를 전자는 검찰이요, 후자는 양아치라 불렀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 법률적 대통령은 문재인이고, 마음속 대통령은 대한민국 검찰총장 윤석열이며 번외로 밤의 대통령은 모 언론사 사주 아무개다. 물론 윤석열 이름이 갖는 국민적 평가는 대통령 문재인을 보는 호불호만큼일수도 있다.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최순실(개명 최서현) 특검에서 특별검사보에 임명된 윤 검사가 했다는 말 중 하나가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라는 말이었다. 이 말에서 읽혀지듯이 그들은 스스로를 “나는 정무능력이 없다.” 라고 쐐기를 박아놓고 시작한다. 오로지 범죄만 보고 가겠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애초부터 브레이크를 만들지 않은, 멈춤을 잊은 게 아니라 멈춤이 없는 폭주기관차다. 여기다 검찰총장이라는 날개를 달아준 것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병아리 눈물만큼의 책잡힐 일을 보여서는
[용인신문] 시경(詩經) 상서(庠序) 관저에서 말한다. 언자무죄(言者無罪) 문자족계(聞者足戒). 설령 틀린다 해도 말하는 이는 죄가 없나니, 듣는 이가 경계로 삼으면 된다는 말이다. 국민들이 허기가 져서 사는 게 힘들다고 원성이 자자하다면 여기에 대한 책임은 응당 정치인이 져야한다. 정치란 승패를 다루는 점에서는 전쟁과 같지만 실질적인 면에서 정쟁이다. 퇴로를 열어주는 것이 정쟁이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은 전쟁이다. 그래서 정치는 정쟁은 될 수 있어도 전쟁까지 이르러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는 전쟁이다. 국민의 눈에 비친 정치인들의 행태는 영락없는 퇴로를 막고 섬멸해야 할 ‘적’ 이라는 점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로에게 겨눈 총구는 빠르게 도륙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민의 행복 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자신의 배부름과 제 가족 등 따숨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본래 대통령과 집권여당이란 나라의 규모가 크고 작음을 떠나서 권력을 장악한 집단이다. 그 권력에 준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파하는 국민은 치료해주고, 배고파하는 국민은 배부르게 먹여주고, 징징대는 상대 당에 대해서는 배려가
[용인신문] 정치란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정치는 정쟁까지는 할 수 있어도 전쟁까지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누군가가 반드시 죽어 나가야 끝나는 곧, 이긴 자가 진자를 죽여야 속이 시원한 전쟁의 시대로 돌아갔다. 지금은 아얏 소리도 못하는 이정현이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흔히들 탄핵 대통령 박근혜의 복심으로 불리는 그런 자였는데 그가 한창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없고 뭐라도 된 양 안하무인격으로 나설 때 이런 말이 뉴스에 떴다. “내손에 장을 지진다.” 그러나 우문인지 몰라도 손가락에 장을 지졌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다. 요즘에는 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께서 느닷없이, 그것도 뜬금없는 죽을 각오로 단식 투쟁을 한다고 한다. 국민을 위해서 할 일이 산같이 많은 이때에 한가롭게 밥이나 굶겠다니 물론 죽을 각오까지는 할 수 있다. 그보다 더한 각오인들 못하랴마는 문제는 실천이다. 전에 김 아무개의원인가는 뭐가 그리 억울했던지 씨도 안 먹히는 일로 단식투쟁 어쩌고저쩌고 하며, 눈먼 강아지 지푸락 잡아당기듯이 호들갑 떨었다. 혹자가 보기에 그런 모습이 오죽 꼴사나웠으면 툭 쳤다고 한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테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