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4년짜리 벼슬 주제에…. <계강자문季康子問 제자숙위호학弟子孰爲好學 공자대왈孔子對曰: 유안회자호학有顔回者好學 불행단명사의不幸短命死矣 금야칙망今也則亡 論語先進11-6文章> 안회가 죽고 2년 뒤. 염유는 계강자와 공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데 그 자리에서 계강자가 “제자 중에 누가 공부를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안연이라는 제자가 공부를 좋아했는데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사람이 없지요.”라고 답했다.” 계강자와 만남을 끝내고 돌아가는데 궁에서 전갈이 온다. 군주 애공이 공자를 뵈었으면 하니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으면 한단다. 공자가 애공의 궁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애공이 묻는다. 애공이 “제자 중에 누가 공부를 좋아합니까?”라고 물은 이 말은 방금 전 실권자 계강자가 묻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다. 공자는 같은 질문에 단 한 번도 같은 답을 한 적이 없다. 이번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공자가 답하길 “안회라는 자가 있어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를 옮기지 아니하며,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죽어서 지금은 없소. 그 후로는 공부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소.”라고. 공
목민관 하루는 공자(孔子)가 뜰을 거니는데 아들 공리(孔鯉)가 그 앞을 지나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세워 묻는다. 요즘은 무슨 글을 읽는가. 아들이 머뭇거리자 공자가 구체적으로 책을 들먹이며 다시 묻는다. 시(詩)를 읽었느냐? 하니 아들은 “아직 못 읽었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답을 주면서 말한다. 시를 읽지 않으면 사람 앞에서 말할 수가 없다<불학시不學詩 무이언無以言>. 이런 일이 있은 후 아들 공리는 물러나 시를 읽었다고 했다. 다른 날, 아버지와 아들은 뜰에서 또 마주쳤다. 공자가 묻는다. 예를 읽었느냐. 여전히 아들이 머뭇거리며 “아직 못 읽었습니다.”라고 말하니 공자가 답을 말한다. 예(禮)를 읽지 못하면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설수가 없느니라<불학예不學禮 무이립無以立>. 공리는 물러나와 예를 읽었다고 했다. 공자 당시에는 수많은 명저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아들에게 여러 책을 권한 것이 아니라 단 두 권의 책만을 읽도록 했다. 시경과 예기다. 시는 사람의 마음에 나쁨을 없애준다. 논어 위정은 말하길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g
공자의 주자 예수의 바울 동양을 지배한 경전을 꼽으라면 사서(四書)이며, 읽고 공부하는 순서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순이다. 이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禮記) 속의 한 편(編)이었던 것을 유교교설로 묶은 이가 주자(朱子)다. 이후 사서는 공문(孔門)의 사제전수(師弟傳授)의 도맥(道脈)을 잇는 도통지서(道統之書)가 됐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왕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온 백성 필독서가 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정신 세계와 문화를 지배한 국민교과서로 자리매김한다. 유가에서는 사서를 사서라 부르기보다는 성인의 고민이라는 의미로 성경(聖經)이라 불렀다. 그러던 것이 다산 정약용을 거치면서 성경이란 용어는 기독교회의 성경책을 국한하는 용어로 백성들 입에서 불려 지기 시작한다. 공자의 말이 담긴 사서가 유가의 성경으로 양반과 벼슬아치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예수의 말이 담긴 사복음서는 기독교회의 성경으로 백성들과 가난한 자들의 의지처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 정도 600년사를 이끌어온 공자의 성경은 요람에서 무덤 직전까지 인간의 삶을 척사윤음(斥邪綸音)하는 교서가 됐고, 예수의 사복음서는 죽은 다음날 아침에 있을 인간의 자화상에 대한 나를 쳐서
지방관(地方官)의 일곱 가지 덕목 수령칠사 나를 수양하는 수기(修己)와 남을 편안하게 하는 안인(安人)은 공자 사상의 종착점이면서 지방 수령 덕목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단 한 번의 수령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완성한 12부72조의 덕목지침 ‘목민심서’는 지방수령이 벼슬살이에서 꼭 기억해야 할 글자는 두려워할 외(畏) 자임을 역설한다. 이유는 외(畏)가 수기와 안인의 벼리가 되기 때문이다. 법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지방 수령은 결코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목민심서가 주는 팁이다. 조선 시대 지방관은 지역 주민이 직접 투표를 통해 선발하는 요즘의 지자체 장과는 전혀 다른 임금이 직접 임명을 했다. 그러나 역할 면에서는 임금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것이나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것이나 지역 살림을 책임지고 운영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므로 지방의 수령이 된다는 것은 맘껏 휘둘러도 되는 권한이기보다 반드시 완수해야하는 무거운 책임이다. 임금은 전국 330여개의 고을에 수령을 파견해 왕의 대리자로서 백성을 살피도록 하면서 수령이 해야 할 일이라는 일곱 개의 사령을 주는데 이를 수령 7사라 한다. 첫째는 농
주왕(紂王)의 망국지음Vs 빌보드챠트 석권의 방탄소년단 망국지음의 출전은 사서오경중 하나인 예기와 한비자의 기록이 유일인데 한비자는 열 개의 잘못이라는 《한비자韓非子》십과편(十過篇)에서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진 음악에 관한 고사(故事)를 기록한다. 진나라에 도착한 위나라 영공은 진나라 평공(平公)이 베푼 연회에서 술이 몇 순배 돌자 흥에 겨워 오는 도중에 산동(山東)의 복수(馥水)라는 곳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랑하며 자신의 악사에게 연주케 했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이라는 음악에 통달한 악사(樂士)가 있어 그는 이 음악을 듣고 깜짝 놀라며 왈, “이건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라며 연주(演奏)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음악의 내력을 설명하기를, 이 음악은 주나라 악사인 사연이 지은 것으로(차사연지소작此師延之所作) 주왕(紂王)과 더불어 음탕함을 즐긴 것이옵니다(여주위미미지악야與紂爲靡靡之樂也).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정벌하자(급무왕벌주及武王伐紂) 사연은 동쪽으로 달아났다가(사연동주師延東走) 복수에 이르러 스스로 빠져죽었습니다(지어복수이자투至於馥水而自投). 이 때문에 이 음악을 들으려면(고문차성자故
김정은, 미국을 선제타격 해라? 지금이 기회다. 오늘밤이 가기 전에 김정은 너는 미국 본토를 쳐야한다. 아마도 지금 네가 하나쯤 감춰둔 비장의 조커가 있을 거 아닌가. 아니면 숨겨둔 에이스라도 하나 꺼내서 미국본토를 쳐라. 핵폐기장을 파괴 했다 하지만 세계는 김정은의 그런 속뵈는 액션에 놀아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늘밤 그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너는 평생 미국에 끌려 다닌다. 잊지 마라. 중국은 너의 메시야가 아니다. 김정은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이후 중국에 불려가서 시진핑에게 뭔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태도는 훨씬 변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노년의 트럼프 눈에 손자뻘밖에 안 되는 어린 김정은이 이중플레이하는 짓거리가 괘심해 보였을 것이다.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위치는 그거 별거 아니다. 그까짓 거.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 백 개 아니라 만 개가 있은들. 미국 특수부대 1개 소대면 쓸어버리는 것쯤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북한을 정상국가로의 진입에 도움을 주려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심에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의 수고가 있었고, 그 측면으로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빈정
정치하수 야당 대표를 다루는 법 정당성이 확보되지 못한 정권은 위험하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군주는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서경』의 기록이다. 은(殷)나라 탕왕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무력으로 방벌(放伐)했고, 주(周)나라 무왕 또한 폭군 주왕(紂王)을 무력으로 방벌(放伐)했다. 이는 군주의 존재 목적이 백성을 위함이라는 말이다(탕방걸湯放桀 무왕벌주武王伐紂 서경왈書經曰 성탕방걸우남소成湯放桀于南巢). 맹자는 이러한 방벌(放伐)에 대해 “일개 필부인 주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고 제선왕의 물음에 일갈한다(문주일부주의聞誅一夫紂矣 미문시군야未聞弑君也 孟子梁惠王). 허신의 설문해자에서 유(儒)는 연약한 사람이 절대 권력인 왕에게 어떤 식으로 대항해야하는가를 나타낸 자이다. 이는 폭우(雨) 속에서 쓰러지는 풀(而)을 나타내는데 곧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는 행위이다. 흔히 사극에서 “전하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와 같은 것이다. 신하가 안 된다고 우길 때는 그에 상응하는 목숨을 내 놓아야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잊지마라. 당신이 잘나서가 아니다. 촛불혁명으로 타오른 민의가 당신을 청와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거늘 공부의 끝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청운의 길과 백운의 길이다. 청운의 길은 등과해서 벼슬을 살러 가는 길이고, 백운의 길은 공부는 많이 하되 세상 꼴 보기 싫어 초야에 묻히는 길이다. 이 둘 사이의 공통점은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천하무생이귀자天下無生而貴者.예기禮記)는 공자의 말이다. 이 말은 맹자에 이르러 민귀군경(民貴君輕)으로 확대 재생산 된다. 백성은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맹자왈孟子曰 민위귀民爲貴 사직차지社稷次之 군위경君爲輕맹자孟子진심하盡心下). 물론 이 말을 모두가 다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 노예(奴隸)편에서 “천지에는 귀한 자도 있고, 천한 자도 있으니 귀한 자는 남을 부릴 것이고, 천한 자는 남에 의해 부림을 당한다. 이것은 불변의 이치다.” 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은 한술 더 떠서 목민심서 변등(辨等)편에서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됨을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일반 백성 대부분은 노비 신분을 면치 못한다. 서경에서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이라 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이는 백성이 그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느뇨? 정치인에게 있어서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백성의 마음이라는 것이 맹자의 일관된 견해다. 맹자는 말한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걸주지실천하야桀紂之失天下也) 백성들의 지지를 못 얻었기 때문이며(실기민야失其民也), 백성을 잃었다는 것은(실기민자失其民者) 그 백성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실기심야失其心也) 『孟子離婁章句上9-1문장』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절록(資治通鑒節錄)에서 백성이 얼마나 위대한 평민인가를 밝힌다. 나라는 백성에 의해 유지되고(국보어민國保於民) 백성은 믿음에 의해 유지되나니(민보어신民保於信) 믿음 없이는 백성을 부리지 못하고(비신무이사민非信無以使民), 백성 없이는 나라를 유지하지 못한다(비민무이수국非民無以守國). 공자는 국가 존립에 세 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밥이 있어야 하고, 군대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한다. 그중 두개를 버리라면 밥과 군대라고 했다.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논어論語안연顔淵무신불립無信不立>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왈, 믿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다(신위만사본信爲萬事本). 여기서 한술 더 떠서 로마의 사형수 예수는 믿음은 태산도
대한민국엔 존경받는 부자가 없다. 사람의 의리라는 것이 모두 가난함에서 끊어지고(인의人義 진종빈처단盡從貧處斷) 세상의 인정이라는 것은 돈이 있는 집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이(세정世情 편향유전가便向有錢家) 인지상정이거늘 이를 두고 세상의 인심이 야박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 가난하면 서럽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가난하면 시장 바닥에 뒹굴어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없고(빈거시무상식貧居市無相識) 부유하면 첩첩 산중에 살아도 먼 친척까지 찾아온다(부주심산유원친富住深山有遠親). 그래서 돈이면 염라대왕도 불러다가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직도 유효한가 보다. 춘추전국시대 경공의 재상 안자(晏子)가 말했다. 윗사람이 예가 없으면 아랫사람을 부릴 수 없고(상무례上無禮 무이사하無以使下), 아랫사람이 예가 없으면 윗사람을 모실 수 없다(하무례下無禮 무이시상無以侍上). 이 말이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요즘 세상은 누군가를 예로 부리거나 예로 모시거나 하지를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가 있다. 그 예에 가고 싶다. 중국문호 루신의 말이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만 있을 뿐이다. 사람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 또한 그 중심엔 돈이 있다. 돈 많은
자기 생각에 깨끗하면 남고, 더러우면 물러나라 빈천교인(貧賤驕人)과 육식자비(肉食者鄙)라는 말이 있다. 가진 게 없기에 되레 당당할 수 있는 선비를 빈천교인이라(<설원說苑존현尊賢편)하고, 뒤가 구린 것이 벼슬만 높은 것을 낮춰 부르는 말이 육식자비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고기 먹는 자들은 식견이 낮고 속되다’는 말인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장공(魯莊公) 10년 기사에 나오는 말로 각각 다른 사자성어임에도 후학에는 한 문장으로 읽히곤 한다. 능력도 안 되는 자가 지위만 높다면 선비는 교만의 끝을 부려서라도 그를 꾸짖는다는 말이다. 송나라 여본중(呂本中)이 동몽훈(童蒙訓)에서 말한다. 벼슬아치된 자가 지켜야할 법은 ‘당관지법(當官之法)’ 오직 세 가지가 있으니 (유유삼사唯有三事)청렴과 신중과 근면이다(왈청왈신왈근曰淸曰愼曰勤). 이 세 가지를 알면(지차삼자知此三者) 몸 지킬 바를 안다(지소이지신의知所以指身矣)고 했다. 청(淸). 신(愼). 근(勤)은 본래 청직신근(淸直愼勤)의 준말로 안으로는 마음을 깨끗하게 즉 청렴과 정직이고 몸 밖으로 남에게 보일 때는 삼감이 있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고지학자위기(古之學
깜도 안 되는 자들이 완장을 차겠다고? 논어 헌문편에서 말한다. 옛날의 배우는 자는 자신을 닦기 위해 공부했고(古之學者爲己), 지금의 배우는 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공부한다(今之學者爲人). 이 문장에서 왜 공부하느냐 라는 물음을 읽어내야 한다. 나를 위해 공부를 하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공부를 하든, 옛사람의 공부의 끝은 벼슬이다. 벼슬에는 두 개의 길로 통하는데 청운의 길과 백운의 길이다. 청운은 환로(宦路)이며, 백운은 무관(無官)이다. 다만 수신을 한 후에 벼슬에 나가느냐 수신이 덜됐지만 벼슬에 나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만약에 수신이 덜된 사람이 벼슬을 하면 자하의 말처럼 벼슬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벼슬을 해야 하는(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論語子張) 이중고에 시달림은 물론이려니와 벼슬 노릇도, 그렇다고 공부하는 확인 노릇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벼슬하려는 사람은 일정량 공부를 한 뒤에 벼슬길로 나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란 당나라 위징이 말한 수징(囚徵)을 말하는데, 성현의 말씀을 내 몸으로 끌어와 나를 그 말씀 속에 가두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몸을 닦고(修身), 닦은 몸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