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엔 존경받는 부자가 없다.
사람의 의리라는 것이 모두 가난함에서 끊어지고(인의人義 진종빈처단盡從貧處斷) 세상의 인정이라는 것은 돈이 있는 집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이(세정世情 편향유전가便向有錢家) 인지상정이거늘 이를 두고 세상의 인심이 야박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
가난하면 서럽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가난하면 시장 바닥에 뒹굴어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없고(빈거시무상식貧居市無相識) 부유하면 첩첩 산중에 살아도 먼 친척까지 찾아온다(부주심산유원친富住深山有遠親). 그래서 돈이면 염라대왕도 불러다가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직도 유효한가 보다.
춘추전국시대 경공의 재상 안자(晏子)가 말했다. 윗사람이 예가 없으면 아랫사람을 부릴 수 없고(상무례上無禮 무이사하無以使下), 아랫사람이 예가 없으면 윗사람을 모실 수 없다(하무례下無禮 무이시상無以侍上). 이 말이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요즘 세상은 누군가를 예로 부리거나 예로 모시거나 하지를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가 있다. 그 예에 가고 싶다. 중국문호 루신의 말이다. 지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만 있을 뿐이다. 사람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 또한 그 중심엔 돈이 있다. 돈 많은 사람은 갑중에 갑이다. 안하무인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날아가는 비행기도 돌려세우는 것은 그녀의 심오한 그 무언가 때문이 아니다. 돈 많은 아비를 뒷배로 둔덕이다. 젊은 여자하고 놀아난 남편의 동영상이 천하를 떠돌았어도 그런 더러운 인간을 못 버리고 사는 이유는 그가 가진 돈이 주는 안락함 때문이다.
공자는 물질적 부와 정치적 권력으로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성인이다. 그러나 범부는 돈을 제외한 어떤 경지에 오른들 공자가 이른 성인의 경지에는 어림 턱도 없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끓여먹는 주제에 대의만 논하는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가난한 선비들을 경멸하며 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면서 부언하기를 대체로 일반 백성들은(범편호지민凡編戶之民)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부상십칙비하지富相什則卑下之),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백즉외탄지伯則畏憚之),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하고(천즉역千則役) 만 배 많으면 그의 노예가 된다(만즉복萬則僕). 이것이 세상 이치다(물지리야物之理也) 『司馬遷 史記 貨殖列傳』 사마천은 한 가지를 모르고 죽었다. 조선시대 양반은 얼어 죽을망정 곁불 쬐지 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