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이 있어야 가능하다. 죽음이 의미가 있으려면 살아있는 날수에 대한 치열한 진정성이 묻어나야한다. 근자에 와서 뜸금 없는 한 사내의 부고(訃告)를 듣는다. 기독교 정통교단에서 이단아로 통하는 구원파 창업주의 사위이자 현 구원파의 실질적 교주 유 아무개의 죽음이 그것이다. 인고유일사(人固有一死)-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홍중우태산(或重于泰山)-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 홍경우홍모(或輕于鴻毛)-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용소추이야(用所趨異也)-죽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오대양 사건이후 두 번째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봉상리. 앞 바다 팽목항 세월호 침몰 사건이 시발이다. 현상금까지 내걸고 잡으려했지만 소문만 무성 할 뿐 잡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이젠 죽었다 라며 국립 과학수사연구소가 DNA분석까지 마쳤다는 소식이 뉴스로 떴다. 고래(古來)로 천금의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 법(千金之子不死於市)인데 죽었다하니 어안이 벙벙하긴 하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그가 부활 했다는 소식을 듣지 않길 바랄뿐이다. 왜냐면 옛말에 지게지고 벌면 갓 쓰고 먹더라고, 지게지고 버는 사람들은 삶이 고되
동양의 사유나 도덕론에서 가장 오래된 단 하나의 글자로 된 진리를 꼽으라면 단연 예(禮)일 것이다. 예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반듯하게 잡아주는 벼리다. 이 벼리는 남에게 무례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날 선 정직함으로 분노하며 살기보다는 예로서 날선 정직함의 분노를 무디게 하라면 비겁일까. 12세 때 논어를 읽은 퇴계는 훗날 자신의 손자를 엄히 꾸짖는 편지 한 통을 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친다하여 이를 격대(隔對)교육이라 하는데 들은 게 많은 손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른의 말씀에 빠지지 않고 도전적으로 답변을 한다. 그것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 해도 무례인데 하물며 어른 말씀에 끼어드는 것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너는 여러 어른들 앞에서는 조급함을 버리고 조용히 말해야한다. 어른들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들어 두었다가 나중에 생각을 해보고 자세히 살펴서 그 중 이치에 가까운 어른의 의견을 따라서 유익함을 얻는 것이 옳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설픈 지식으로 너의 생각을 지나치게 주장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하고 소리를 높여 떠들면서 여러 어른들의 말을 앞질러서 하는구나. 가령 너의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선비가 가난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선비는 아웃이다. 지식인을 선비라 칭함은 시대에 대한 발언 때문이다. 옛 선비는 두 가지에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명운을 건다. 상소문을 몇 룹 올렸는가, 적소 귀양을 어느 곳에 두었는가이다. 첫 번째는 차자 간단한 상소로, 두 번째는 상소문으로 올리는데 차자는 진언 禮로 간함으로 하고, 상소문은 직언 쓴 소리로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세 번째 상소문인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한다. 내말이 틀렸다면 이 도끼로 내목을 자르시오라는 엄중문책을 내함 한다. 선비가 임금을 꾸짖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가진 게 많은 선비일수록 상소문의 붓끝은 무뎌 진다. 선비가 목숨을 내 놓고 상소문을 쓸 수 있는 힘은 천작이라는 하늘이 준 벼슬 때문이다. 맹자 고자장구 상에서 맹자 왈 천작은 하늘이 내리는 벼슬이고, 인작은 사람이 주는 벼슬인데 천작이란 인 의 충 신에 최선을 다함에 즐거워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음이다.(孟子曰 有天爵者 有人爵者 仁義忠信 樂善不倦此天爵也) 선비란 아래로 백성들에게는 인과 의로 하고 위로 임금에게는 충과 신으로 섬기는 것을 하늘이준 벼슬로 여기는 거다. 누항의 백성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조선시대 임금 중종과 군신지예(君臣之禮)를 갖추지 않고 술을 마신 선비는 아호를 자암으로 쓰고 자를 대유(大柔)로 쓰는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가 유일했다. 왕희지 서체를 토대로 한 독특한 서체를 체계화 했는데 사숙으로 당초사대가(唐初四大家)의 서법을 모두 섭렵한다. 이들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운 자들로 구양순의 엄정함, 우세남의 온화함, 저수량의 곱디고움, 유공권의 자연스러움을 발췌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서체를 그가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인수체(仁壽體)라고 한다. 조선 최고의 명필을 꼽으라면 자암을 비껴 갈순 없다. 물론 혹자는 조선4대 명필운운하며 조맹부 서체에 대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진(晉)서체를 저본으로 해서 행서 초서의 대가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왕희지와 안진경 서법을 모두 통달한 신필(神筆) 석봉(石峯) 한진(韓濩) 등과 같은 반열에 놓지만 이는 자암에 대한 무례다. 자암의 글씨는 훗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유수체(流水體)로 승화됐고, 창암의 유수체는 후일 소암의 서체와 듕섭(이중섭)의 그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근자에 와서 자암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일이 많아
관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제나라 환공(桓公)을도와 천하의 패자(覇者)로 이끈 불세출의 인물이다. 더군다나 비주류에서 주류로 진입한 입지전적의 인물임에도 공자는 관중은 그릇은 작다(子曰管仲之器小哉. 論語八佾篇 22文章)며 평가 절하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입신양명의 길에 들어서려면 아버지로부터 주나라의 문과 예를 배워 천하 군들에게 유세하는 가부장제 교육이 주류였다. 이에 반해 공자는 편모슬하에서 한곳에 정착하는 모계 중심의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성장과정 탓에 관중을 보는 시각이 뒤틀릴 수밖에 없다. 혹자 왈, 관중은 검소합니까 공자 답, 관중은 집을 세 군데나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검소할 수 있겠는가 또 혹자 왈, 관중은 예를 압니까 혹자 답, 임금이 가림 벽을 세우자 관중도 가림 벽을 세웠고. 임금이 두 나라 임금사이의 우호 증진을 위하여 술잔을 엎어놓는 잔대를 설치하자 관중도 잔대를 설치했다. 이러한 관중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랴할 정도로 관중에 대해 가학적이었다. 물론 관중의 업적에 대하여 칭찬을 하기도 한다. 주례복귀(周禮復歸)를 주장하는 공자의 입장에서는 제후의 신하에 불과한 관중의 분수를 넘는 사치가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생존하고 있는 사이비. 이단에 관련된 교주들의 한결같은 공통된 특징은 뼛속까지 자본주의자다. 이들은 신도들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기 위하여 밤낮으로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헌신으로 애를 쓴다. 신도들의 불안 심리를 절묘하게 극대화 한 후 이를 컨트롤해서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만든다. 더 기막힌 사실은 교주는 자신을 절대로 신격화하지 않는다. 다만 신도들이 교주를 신으로 모시도록 조직화 할 뿐이다. 신도들은 서로 앞 다투어 교주를 섬기고 손바닥이 찢어질 정도로 손뼉 치며 목이 터져라 찬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믿음이 혹시라도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잊으려한다. 이쯤 되면 교주는 가끔이지만 비밀의 말씀이라 하여 천당에 관한 설교를 슬쩍 흘린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 죽으면 천당 갈 텐데 이 땅에서 그깟 돈이 뭐에 필요하냐라고 하면서 덧붙이기를 하나님께서 너에게 돈을 벌게 한 이유는 돈 벌어서 처자식 먹여 살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네 죄를 사할 수 있도록 물질로 봉사하라고 하나님께서 네게 돈을 벌게 한 것이라며 도덕적 의무론까지 들먹이며 가슴을 쿵하고 울린다. 심신이 허약한 신도들은 마치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혼자 아는 양 가슴에 뿌듯함
하늘은 인류에 사령(四靈)을 두었는데 첫째가 봉황으로 거부가 됨이요, 둘째가 기린으로 자손 많음이요, 셋째가 거북이로 장수함이요, 넷째가 용인데 제왕을 의미한다. 창업주 아산은 봉황과 기린 상을 반반씩 가졌기에 그는 수신제가와 돈으로 평천하까지는 갔으나 치국은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 그에게는 걸출한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정몽준 전의원이 그다. 정몽준 전의원은 봉황과 용상을 7대3으로 가졌다. 재물이 7이요, 제왕의 기운이 3이란 말이다. 삼경(三經)의 하나인 주역(周易)에 운, 길(吉)과 흉(凶), 화(禍)와 복(福)을 음양의 이치로 풀어내는 64괘(卦)가 있다. 이중에서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는 야성을 가진 남성성이다. 특징으로 논어에서는 이를 눌변(訥辯)이라 한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을 두개로 압축한다. 눌변과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눌변은 말을 어눌하게 함이요, 교언영색은 말에 사탕발림이다. 아산의 아들 정몽준 전의원은 말에 사탕발림이 없고, 말에 달변이 아닌 눌변이다. 이미 그는 용상을 갖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태생적 한계가 있으니 아버지의 원죄다. 죽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현대 가(家)에 관한 누항(陋巷)의 말 중에 정문삼죄(
퇴계 이황을 사숙한 조선의 선비 제암(霽巖)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 저본으로 불후의 명저(名著)를 지은 것이「인심흑백도(人心黑白圖)」다. 이는 사람을 성인군자,똑똑이,헛똑똑이 평범인으로 구분한다. 성인은 저절로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요, 군자는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學而知之)요, 똑똑이는 노력해서 부끄럼이 몸에 이르지 않는 곤이지지(困而知之)요, 헛똑똑이는 시험 잘 봐서 간판만 그럴싸한 곤이불학(困而不學)요, 범부는 결심은 하지만 매번 못 지키는 생활 교이불선(敎而不善)이라고 갈파했다. 이에 공자는 생이지지와 범부인 교이불선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세 가지의 삶을 강조한다. 첫째, 믿음을 돈독히 하고 세상이치배우기를 좋아할 것이며(독신호학篤信好學). 둘째, 죽음을 당하더라도 도를 잃지 않을 것이며(수사선도守死善道). 셋째, 이웃을 위해 몸을 죽여 인을 이뤄야 한다(살신성인殺身成仁). 인은 딱 둘이다. 위를 사랑하는 양지양능(良志良能)의 치사랑과 내리사랑이다. 치사랑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요. 내리사랑은 자식을 사랑하는거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 중심에 박근혜 대통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위로는 양지양능 할 부모가 아니 계시고, 아래
구분자퇴조왈상인호불문마(廐焚子退朝曰傷人乎不問馬). - 향당편(鄕黨篇) 12장(章)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께서 조정(朝廷)에서 물러나와 물으신다. 사람이 상했느냐?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는 것이 기존 해석이다. 이 문장은 공자의 토종 왕도정치 철학임에 틀림없지만, 방점의 위치에 따라서 법치의 패도정치로 나뉠 수 있는 화약고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공자께서 찬(纂)한 것을 후학 주자는 집(集)해서 주(註)로 역(譯)을 했다.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책 주자집주가 그것이다. 우암은 주모(朱謀) 주자‧ 주희께서 이미 다 풀어 놓았거늘 후학이 감히 첨언(添言)한다는 것은 불경을 넘어 사문난적이라고 말한 이유가 왕도와 패도 때문이다. 이 사문난적의 중심에 그의 30년 지기 백호 윤휴가 있다. 우암은 사계의 문도다. 사계는 어린 시절 율곡을 거쳐 귀봉 송익필에게 글을 읽은 뒤 다시 율곡에게서 글을 읽는 재가문도(在家門徒)이다. 그 재가문도의 재가제자가 백호 윤휴와 우암 송시열이다. 백호 윤휴와 우암 송시열이 갈라서게 된 문장이 분마자퇴(廐焚子退)다. 백호는 상인호불(傷人乎不) 에서 방점을 찍는다. 상인호불(傷人乎不) / 문마(問馬)다
섭공(葉公)이 우리 마을에 정직한 아들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아버지를 관아에 고발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는 우리 마을의 정직한 자는 좀 다르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니, 정직함이 이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라고 답했다. (葉公 語孔子曰 吾黨 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論語子路篇 18文章) 어찌 보면 섭공의 말이 옳다. 하지만 국가가 여기까지 관여한다면 숨 막히는 세상 정도가 아니라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라는 게 공자의 생각이다. 공자의 말이든 섭공의 말이든 어느 것을 선택하든 둘 다 위험한건 매 일반이다. 그만큼 이 문장이 갖는 위험성이 크다는 말이다. 인류 역대 지도자중 그 누구도 이 문장을 활용한 지도자는 없었다. 사문화 된 문장을 통치수단으로까지 끌어올려 되살린 사람이 근대 인류사에 둘이 있는데 모택동과 김일성이다. 이 문장은 그들이 자신의 왕국을 정당화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문장이다. 김일성과 모택동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민(民)이 군도(群徒)로 세력화되는 것이고 군도가 민란(民亂)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만하는 사람은 돈 벌 틈이 없다. 사석에서 빌게이츠가 웃자고 했다는 말이라는데 실제로는 앞 세대인 록펠러가 한 말이라 한다. 애쓴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비록 저자거리의 허드렛일이나 말 몰아가는 일도 하겠지만 애를 써도 부자가 되지 못 할 바에는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 (子曰 富而可求也 雖孰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논어술이 7-11문장). 인생 포기 선언문과도 같은 이 말은 놀랍게도 성인 공자의 말이다. 돈 많은 소인배는 있어도 돈 없는 대인 배는 없다. 이 말은 돈이 없으면 성인도 소인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옷과 음식이 넉넉해야 영욕(榮辱)을 안다. 예는 돈이 있으면 생기고 돈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돈은 벌고 봐야한다고 한다. 돈이 없는 사람은 몸으로 때워 돈 벌고, 돈이 약간 있는 자는 머리를 써서 돈을 더 벌고, 이미 돈이 많은 사람은 시류를 타서 이익을 남긴다(是以無財作力 少有鬪殼智 旣饒爭時 此其大經也). 이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그의 책 소비의 사회1970에서 말했다. 갑부
노(魯)나라 빅 쓰리는 중손씨(仲孫氏) 훗날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며 계손씨의 세력이 가장 컸다. 어려서부터 공자는 먹고 살기위해 계씨 집안의 창고지기가 된다. 생각은 가(家)보다 국(國)이지만 현실은 계무자(季武子), 계평자(季平子), 계환자(季桓子), 계강자(季康子), 4대에 걸쳐서 밥벌이 때문에 인연을 유지한다. 계환자(季桓子)와 소원해져서 위나라로 망명했지만 그의 아들 계강자(季康子)가 다시 국정 고문으로 모셔온다. 공자의 나이 68세다. 젊은 실권자 계강자(季康子)가 정치에 대해 묻는다. 선생님, 저는 나쁜 놈들을 다 죽여 정의를 바로 세우고 싶습니다(季康子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何如). 공자 왈. 정치를 해야지 어찌 살인을 하려는가, 그대가 먼저 착하면 백성들이 착해질 것이다(孔子對曰 子爲政 焉用殺 子欲善 而民 善矣). 군자가 바람이라면 소인은 풀이니,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 草上之風 必偃).顔淵篇 19章 이에 시인 김수영은 독특한 새김을 한다. 그의 시풀이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시인 김수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