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소묘 김관식 꽃으로 치면 아주 활짝 핀 석류꽃과 같은 꽃 우리나라에도 해와 같이 황홀히 광명하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라 아하 빛이여 눈이 시리다. 눈이 멀을까 눈을 뜨지 못하것네. 봄이 와 밭고랑에 포란 옥비녀 꼭지처럼 봉곳한 옹곳 싹이 뾰조록이 돋으면, 으너진 돌무덤부터 금이 간, 틈서리에 잠깨어 흙을 털고 부시시 일어나는 놈이 있고녀. 내가 꿈에 본 한 마리의 땅벌레. 김관식(1934~1970)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서 출생했다. 1955년 서정주가「연 외 2편을『현대문학』에 추천해 시인이 되었다. 미당과 김관식은 동서지간이다. 1960년 4.19 혁명 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에 출마해 낙선한 후 궁핍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라소묘」는 신라에 대한 예찬 시다. 석류꽃 같은 나라, 눈이 시린 빛의 나라, 봄이 오면 온갖 새싹이 돋아나는 나라여서 한 마리의 땅벌레 같은 나라라고 노래한다.『한국전후문제시집』중에서. 김윤배/시인
소곡小曲 김종문 땅 위를 겹겹이 감싸온 베일을 헤치며 버리는 묵은 율동, 별들이 담기는 냇가에 멍든 상처를 씻고 의상을 갈아입으며 맞는 보리밭에 두발을 딛고 서서 바라다보는 구름은 고원의 기슭을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는 양떼, 피리소리에 맞추어 냇물소리를 눈으로 듣는 세계가 있다. 김종문(1919~1981)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으며 1952년『문예』지에 시「신천지」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57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6.25의 참상을 투명한 이미지로 조명했고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는 인간의 의지를 형상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곡」 역시 그의 긍정적인 세계관이 투영된 작품이다. 땅 위의 베일을 걷어내고 묵은 율동을 버리고 냇가에 나가 상처를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보리밭에 서자는 것이다. 서서 구름을 보노라면 고원의 기슭을 뛰어다니는 양떼라는 것이다. 피리소리에 맞추어 듣는 냇물소리는 눈으로 듣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귀선歸船 한경용 나의 할아버지는 어부시다 작은 배 한 척이면 노을이 물결 위에 잠들 때까지 어망 속으로 태양을 걷어 올린다 파도를 저어가며 시름을 건저 올린 팔뚝의 힘줄에는 살아 있는 고기들이 노래하곤 한다 바다를 메고 오실 만선의 가슴을 위해 달음 쳐 나간 폭풍우 치던 갯가 남은 가족 모두가 울음을 토하고 할머니는 슬래브 지붕에 올라가 와이셔츠를 흔들고 계신다 남쪽으로 흐르는 신화 선홍빛 염주 터뜨린 언어들 빈 그물을 빠져나오고 있다. 한경용은 제주도 김령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2010년 계간 『시에』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의 지난날에 대한 오래고도 진중한 고백과 스스로의 삶을 통한 미학적 탐구의 과정이 시로 승화 된 것으로 보인다. 내밀한 자전적 고백의 시편들이 여러 편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귀선歸船」은 어부였던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레퀴엠이다. 작은 배 한척으로 바다를 낚아오시던 할아버지는 그날 죽음으로 돌아왔다. 폭풍우 치던 날이었다. 가족 모두가 갯가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혼백을 부르기 위해 슬래브 지붕 위에서 할아버지의 와이셔츠를 흔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신화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왕생극락을 비는
부리 박설희 바람을 입는다 두 눈에 해를 가슴에 달을 품고 맨 앞에 내세운 부리 끝이 닳아있거나 금이 가 있거나 그것은 집 짓고 사냥하고 깃털 고른 흔적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찻잎 같은 혀 그리고 공룡의 포효보다 야무진 침묵 발을 뒤로 모으고 허공을 가로지를 때 앞세운다, 제 존재가 무엇보다 크고 귀중하다 일러주는 따뜻한 부등호 박설희는 강원도 속초에서 유년을 보냈다. 2003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가 있으며, 이번 시집이 세 번째 시집이다. 「부리」는 어느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새의 부리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진 시다. 새는 날며 바람을 입는다. 그리고 두 눈에 해를 담고 가슴에 달을 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새는 맨 앞에 부리를 내세운다. 부리는 끝이 닳아 있거나 금이 가 있다. 집을 짓고 사냥하고 깃털을 고른 흔적이다. 부리 속에는 찻잎 같은 혀가 감추어져 있다. 부리는 야무진 침묵을 지킨다. 새는 발을 뒤로 모으고 허공을 가로지를 때 부리를 앞세운다. 새가 나는 모습은 제 존재가 무엇보다 크고 귀중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따뜻한 부등호로 보이는 것이다. <푸른사상
구인 광고 윤경예 큰물 다녀간 골목 ‘급 안마사 구함’ 말라간다 아니, 꿈틀거린다 환대는 몸 밖에 두었으므로 세상은 허물 하나 없음이 허물이므로 살과 뼈를 덮을 흙빛 한 줌 얻고자 했을 구인蚯蚓들 떼죽음 당하는 것쯤은 무서울 것 없다고 눈알 부라리고 있다 전단지로 따악, 붙어 있다 윤경예는 2018년 제1회 남구만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녀의 시는 섬세하고 아름답다. 세련된 은유를 구사하는 것도 그녀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어느 골목에 들어서도 구인 광고를 지천으로 만나게 된다. 구인 광고 위에 구인 광고가 수없이 덧붙여져 있기도 하다. 구인 광고 한 장이 한 사람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필요한지 헤아릴 수 없다. 구인 광고는 도시 빈민의 삶의 모습이다. 이곳저곳에 남루하게 붙어 있는 구인 광고는 고급한 인력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음식점이나 접객업소, 또는 미용실이나 목욕탕 등 자영업을 하는 소규모 사업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별한 기술직이 아니어서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직율이 높은 것은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일 골목마다 구인 광고가 넘칠 수밖에
육십령 5 박일만 골목을 몇 바퀴 돌아도 적막하다 빈집은 스러져 가는데 마당에 꽃이 폈다 작년에 돌아가신 이모님이 이승을 떠도시는지 생시에 심어놓은 꽃들만 마당에 가득하다 봉숭아꽃이 마지막 피를 토하고 꽃무릇이 손톱으로 하늘을 할퀸다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은 흑백이다 박일만은 전남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육십령에서 태어났다. 이번 시집이 육십령 연작으로 되어 있는 연유다. 그는 2005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그는 점점 낙후 되어가는 농촌 현실을 직시하며 고발하고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것이 인간의 탐욕 때문임을 외친다.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또한 이번 시집을 통해서 드러낸다. 육십령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그의 문학적 토양이기도 하다. 「육십령 5」는 피폐해가는 농촌의 풍경이다. 적막한 마을에 빈집이 늘어나고 그 빈집 마당에 꽃이 피었다. 지난해 이모님이 돌아가신 후 집은 비어 있는 것이다. 혼령이 이승을 떠돌고 계신지 살아생전 심어놓은 꽃들이 마당 가득한 것이다. 피를 토하듯 붉은 봉숭아꽃, 하늘을 할퀴는 꽃무릇이 피어 있는 마당 또한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에는 생기가 없다. <달아실> 간
중턱에서 발견된 페이지 이종민 저 산 깊은 곳 아무도 가지 못한 골짜기에 잎 대신 종이가 자라는 나무 한 그루 있다고 한다 손끝을 베어 주렁주렁 매달린 종이마다 글씨를 쓸 거라고 그가 풀밭을 밟으며 말한다 나는 그러면 반창고에 연고를 발라 그가 쓴 글씨 위에 붙여 두겠다고 들려주고 싶었지만 이종민은 2015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는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과 선명한 감각이 어우러진 개성적인 어법의 시세계를 보여왔다. 그의 첫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에는 물의 이미지가 자주 출현한다. 물은 시인의 의식에 스며드는 세상 사물들이며 세상을 응시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로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담백하게 표출한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시적 사유의 힘이 진솔한 울림과 공감을 갖게 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시는 현실을 향한 비애이거나 우울의 작은 조각이기도 하다. 「중턱에서 발견된 페이지」는 현실의 문법이기보다는 상상의 문법이다. 아무도 가지 못한 골짜기에 나뭇잎 대신 흰 종이가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문장이 그렇다. 그 종이에 손끝을 베어
크럭스 정다연 창문에 매달린 실거미를 보면 툭, 가지 끝 물방울을 털 듯 떨어뜨리고 싶어져 아래로 더 깊은 낭떠러지로 내리치는 빗방울, 끝없이 흘러드는 빗줄기 눈동자 쉴 틈 없이 때리는 다정한 말 힘을 빼 그러지 않으면 더 아파 멍든 낙법 자세 더 잘 배울 수 있을까 끝까지 매달렸어야 했을 송곳처럼 손발의 힘을 모았어야 할 푸른 암벽 정다연은 1995년 수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15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세상을 응시하는 예민한 감각과 탁월한 시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단정한 시 세계를 펼쳐온 그녀는 이미 2019년에 현대문학의 소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이후 2021년에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그녀는 “언젠가 지면에서 저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어요. 세상에 대한 상상력,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포함해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은 상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달리는 사람에게 땅이 확장되듯이 먼 곳까지 가보는 넓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녀의 시가 상상력의 세계를 향해서 치열하게 나갈 것이라는 예견을 하게 한다. 「크럭스
나는 약해 이근화 고작 숲이야 고래야 발이 젖었어 나는 버스야 굴러가는 바퀴야 알록달록해 나는 언제나 나는 그러나 쓰러지고 말거야 기어가고 말거야 집이 잠긴다 창문이 녹는다 골목길이 터진다 나의 실핏줄이 파도야 흘러가는 봄이야 멈추지 않는 손이야 감기지 않는 눈이야 이근화는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시 언어의 혁명적인 가능성을 조용하게 밀고 가며 독특한 발상과 낯선 화법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인이다. 「나는 약해」 또한 그녀의 독특한 발상과 낯선 화법으로 쓰여진 시다. 첫 연의 숲과 고래와 젖은 발은 서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걸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이다. 둘째 연으로 미루어보면 나는 고작 숲이고 고래고 젖은 발을 가졌다고 읽어도 될 듯하다. 다음 연은 나는 버스고 굴러가는 바퀴고 알록달록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읽힌다. 나는 언제나 숲처럼 조용하고 고래처럼 젖은 발이지만 그러나 나는 쓰러질 것이고 기어갈 것이다. 나는 집을 향해서 그렇게 할 것이지만 집은 잠기고 있다. 창문은 녹고 있다. 집이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의 집은 실제의 집은 아니다. 언어의
농담 윤은성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 될 때라는 것을 알았다.그는 무언가를 듣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차가운 손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이 있었고. 모닥불 곁에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고.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잠시 눈을 붙여도 되었다. 나는 그가 앉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움직였고. 나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대의 표정을 살피려 했는데. 다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물소리 너머에서 들리고. 무슨 말들을 하는 거니. 손으로 축축한 흙바닥을 더듬고 있었는데. 얼굴 앞의 모닥불은 너무 따뜻하고. 등은 서늘해오고. 그대가 모닥불 곁에 없고. 윤은성 시인은 1987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2017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시단에 나왔다. 그녀의 시에서는 예민하되 사려 깊은 화자가 자신의 상처를 조심스레 꺼내 보이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녀의 시적 주체들은 길을 잘못 들어선 가난한 여행자처럼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기나긴 시간을 헤매고 다닌 자의 비애와 체념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의 시적 주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지는 않는다. 그녀의 첫 시집 『주소를 쥐고』
단풍 김경후 눈 먼 새들 열린다 날개 묶여 열린다 핏빛으로 떨어진다 열린 채 얼어붙은 채 엄마, 떨어지면 날아가? 가을 하늘은 멀고 높다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열리고 닫힌다 내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날아갈 듯 핏빛 눈빛들 김경후(1971~)는 서울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열두 겹의 자정』『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등을 펴냈다. 그녀는 “우리는 살면서 울음을 참기를 강요당해 오히려 속 시원하게 울지 못할 때가 많다” 고 말한다. 이런 마음을 좀 더 섬세하게 다뤄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녀는 “누구를 생각하며 시를 썼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너무 힘들어서 울지 못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고 말하기도 한다. 「단풍」은 섬세하고 도시적인 시다. 붉게 단풍 든 낙엽들을 눈 먼 새로 보았다는 것이 시의 모티브일 것이다. 날개가 묶여 나무에 열린 낙엽들, 핏빛으로 얼어붙은 채 떨어지는데, 떨어지며 나무에게 묻는다. “나 떨어지면 날아가?” 낙엽이 날아가는 가을 하늘은 멀고 높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된다. 지하철 안에서 화자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안에는 날아갈 듯한 핏빛 눈빛들이
닫힌 문 너머에서 이혜미 곁을 비우며 멀어지는 손끝처럼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고 그 문을 떠날 때 우글거리겠지, 썩고 마르고 흐르고 무뎌지겠지, 사그라들다 환해지겠지, 먼지를 품겠지 새로 지은 어둠을 선물하면 오래 닫아둔 문 뒤는 흑백이 우거지는 입체가 된다 약속이 저마다의 문이라면 모두가 열쇠를 내버리고 함몰하는 방들 겹겹의 미로 속에서 오랜 다짐이 무너진 뒤에야 짐작하지 닫힌 눈꺼풀이 몸의 가장 어두운 뒷면이었음을 이혜미(1988~)는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2006년, 최연소인 19세에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 등이 있다. 이희섭 시인이 아버지고 정용화 시인이 어머니인 시인가족이다. 「닫힌 문 너머에서」는 죽음을 노래한 시로 읽힌다. 닫힌 문은 삶이 닫힌 문일 것이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했다면 일생을 끝냈다는 의미다. 묘지에 묻힌 사람 때문에 썩고 마르고 눈물 흐르다 무뎌질 것이다. 시신은 사그라들다 뼈가 환해질 것이며 먼지로 바뀔 것이다. 새로 지은 어둠은 결국 무덤일 것이고 무덤 속은 흑백이 우거진 지하 세계가 될 것이다. 약속이 문이라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아서 열쇠를 버려야 할 것이고 방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