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더운기가 살짝 가시기 시작하는 선선한 저녁. 왜 재미있는 이야기는 밤에 시작될까? 밤에 슬쩍 내어놓는 진심들과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재미있어 새벽까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옛날이야기들은 재미있고, 남의 시행착오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다. 들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내게 해방을 주기도 하고, 정의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려운 부분에 대한 힌트를 주기도 한다. 나보다 먼저 경험했던 사람의 시행착오는 그 자체로 배울 게 너무 많다. 문제 정의하는 방법과 찾아왔던 답까지 한 번에 들을 수 있다. 가지고 있던 고민을 살짝 내어놓고 기다리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구나, 이걸 내가 느끼고 있었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밤에는 언제나 시간이 사라진다.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선배가 있다는 게 감사하게 느껴지는 밤.
용인신문 | 오랜만에 돌아온 집과 한국은 아직 어색하다. 알게모르게 긴장했던 몸은 많이 풀어졌지만, 아직 사회적으로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정리하는 기간이다. 가끔, 어떤 시절이 가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가 되면 이전까지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더 이상 좋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야 한다. 돌아보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던 것들,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내려 놓는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무엇이 올지 모르기에. 하나의 시기를 보내고 나면 축하와 애도를 잘 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축하는 축하지만 애도는 왜일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조금 알겠다. 다음 장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빈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
용인신문 | 길이나 장소 기억을 잘하는 편이다. 걸어 다니면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을 주의 깊게 보면서 걸어 다니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여기 간판이 이런 색이네, 잘 안 쓰는 색 조합인데. 이 오토바이 좀 귀엽다! 저기 사람들이 싸우고 있네? 같은 작은 정보들이 쌓인다. 그러면서 머릿속의 지도에 이 길은 여기와 연결되어 있구나- 하며 최신 정보를 저장한다. 길을 잘못 찾는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그렇게 저장된 기억들은 마치 사진처럼 남아서 오랜만에 그 장소에 갔을 때도 어느 정도는 기억난다. 그래서 여행한 지역들은 기억으로도 남아있지만, 거리의 느낌과 인상들로도 남아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만나 지쳐서 들어간 카페에서 마신 맛있었던 커피집, 매일 바뀌는 메뉴를 먹으러 갔던 호스텔 앞 음식점들이 내 머릿속 비밀 지도에 저장되어 있다. 그렇게 남는 가게들은 언젠가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용인신문 | “말은 혼자 간직하는 게 아니야. 듣는이와 말하는 이가 나눠서 간직하는 거야.” 우연히 본 한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다.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고 살지만 어떤 말들은 오래 간직하게 된다. 요새 나는 무슨 말들을 했나, 하고 한참 생각해봤다. 나는 말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한 마디가 정말 빛이 될 수 있다고, 그 한 마디가 나의 존재보다 상대에게 오래 남아 기억하게 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보물같은 메모장이 하나 있는데, 인상깊거나 마음을 울리는 말을 들으면 늘 적어둔다. 가끔 읽으면 그 말들은 여전히 그 빛을 간직하고 내게 힘을 준다. 오래 간직할 그 말들.
용인신문 | 이 더운날 울릉도를 걸어서 돌고 있다. 와~ 이렇게 맑고 물색이 푸른 곳이 한국에 있었다니! 걸어다니는 내내 덥다는 생각보다 탄성이 먼저 나온다. 한끼는 라면을, 한끼는 맛있는 밥을 먹는 작전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 이상 물에 들어가기! 바닷속에는 신기하게 분홍색 돌들이 많고, 물고기들이 떼를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물속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완전히 물고기들의 세계에 빠져서 따라다니다가 물밖으로 올라오면 그 시차가 느껴진다. 그리고 따라오는 허기. 내일 또 뛰어들어야지!
용인신문 | 여름엔 봉숭아물이지! 한국에 들어왔다. 마음 놓고 기대며 살고 있다. 맛있는 밥을 먹고, 밭일을 가끔 돕고, 계곡에 가 수영을 하고. 어제는 봉숭아를 한아름 뜯어와서 봉숭아물을 들였다. 남원에서 지내고 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소꿉친구도 며칠 놀러 와서 그때마냥 놀고 있다. 답답했던 것들 내려놓고, 비닐로 묶어 느낌이 이상한 손가락을 참으며 잠에 들고 났더니 예쁜 다홍색으로 물든 손끝. 아 여름이다.
용인신문 | 태국에서는 한 달간 방을 구해 지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안 하기 모드에 돌입. 다음 길을 모르겠고 우울할 때는 일단 멈추고 좀이 쑤실 때까지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는 기간을 가지곤 했다. (물론 최소한의 것들은 한다.) 그러면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이 생기고 그 에너지로 다시 시작하는 루틴이었다. 어라, 이번에는 다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게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내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하루하루 잘 보내고 싶었다. 그게 뭘까? 계속 찾고 있지만 왠지 비슷한 곳에도 도달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용인신문 | 10년 전 태국 여행을 할 때 만났던 사람이 있다. 방콕에서 가장 큰 주말 시장인 짜뚜짝. 동대문종합시장을 펼쳐 일 층에 깔아놓은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작은 수공예 가게들이 모여있다. 미로처럼 엮인 길을 헤매던 우리들은 레게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가게를 마주쳤다. 신난 우리들은 춤을 추며 들어갔고,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몇 살이냐고 묻고, 순식간에 타위의 가족들을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급기야는 한 명씩 어울리는 옷을 골라 선물해 주기까지 이른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환대에 어안이 벙벙해 했고, 그렇게 이어진 인연에 이후 방콕에 갈 때마다 그 집에 들러 지내게 되었다. 한동안 태국에 갈 일 없어 연락이 끊겼다가 5년 만에 연락했어도 너는 내 한국 딸이라며 언제든지 집에 오라고 해준 타위. 그리고 신기하게 그대로인 집. 참 인연이란 알 수 없다.
용인신문 | 태국에는 유독 한국사람들에 입맛에 맞는 메뉴들이 많다. 고수를 제외하면, 입맛 까다로운 어른들도 즐기실 수 있다. 닭죽 같은 까이만까이, 족발덮밥 카우카무, 카레국수 카오소이, 항정살 구이, 갈비탕, 약간 시큼한 맛의 똠양꿍. 볶음국수인 팟타이와 볶음밥은 2500원이면 먹을 수 있다. 밀크티는 1500원. 아직 이 가격이 가능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엄마와 여행을 할 때는 둘이서 빼놓지 않고 시켰던 메뉴가 있는데, 바로 파파야 샐러드인 쏨땀이다. 시큼하고 맵싹한 야채무침인데, 마치 겉절이처럼 입맛을 싹 돋궈 준다. 또 다른 좋아하는 요리는 뿌팟퐁커리. 게껍질이 단단하지 않은 말랑한 게를 커리에 함께 볶아서 밥과 함께 먹는 요리다. 음식의 즐거움이 여행을 더 다채롭게 만든다.
용인신문 | 태국에 왔다. 태국은 내 첫 배낭여행지로, 고등학교 졸업 직후 가장 친한 친구들이랑 여행했다. 12월 31일에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를 타서,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또 남부로 가는 12시간짜리 밤버스를 탔다. 지금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지옥의 스케줄이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자다깨다 자정이 지난 걸 보고 서로에게 “스무살이 된걸 축하해-!” 하며 씩 웃고는 다시 잤다. 빨빨거리며 남부부터 북부, 라오스까지 다녔다. 처음 만나는 새로운 음식들과, 친절한 사람들, 마법같은 만남들이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용인신문 | 계속 이동을 하며 지낸 지 거의 2년차다. 매일 바뀌는 상황과 해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나는 날들이었다. 매일이 모험처럼 지나갔다.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와 문화들. 지난 두 달은 이제 어딘가에 진득하니 있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완전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많이 해소된 것 같다. 바람은 충족되면 새로운 형태로 바뀌나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루틴을 되찾는 것. 여행을 시작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게 달라졌다. 그래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는 게 조금 무섭게도 느껴진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새롭게 느껴질 것이고, 그런 지점들이 기대된다.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 징검다리 역할로 태국 치앙마이에 한 달 동안 방을 빌려 지내고 있다. 첫날의 일정은 망고와 람부탄, 망고스틴 사기. 호주에서 물 한 병이 400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망고 1킬로 1500원은 믿기지 않는 가격이다.
용인신문 | 사람을 만나 좋은 점은 서로에게 배운다는 것이다. 내게 없는 모습을 보며 닮고 싶은 부분을 찾아내고 존경하게 되고, 가지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며 반면교사를 삼는다. 가장 질투나는 사람은 언어를 세련되게 쓰는 사람이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따라하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며 소통의 오류가 줄어들고, 쌓이는 기억들이 소중해진다. 친구를 만드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만큼, 좋아하는 걸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 반갑고 감사하다. 이것도 시절 인연이겠지만,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더 귀하게 여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