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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대학과 함께한 반백년… 억강부약 세상 만들어야”

장충식 단국대학교 명예 이사장

 

서울 ‘한남동 시대’ 뒤로 하고 뚝심으로 용인 죽전에 새로운 캠퍼스 ‘제2의 도약’
대한적십자 총재 맡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첫 성사 감격… 한반도 평화 마중물
유신정권 저항 학생들 퇴학 지침 내려왔지만 한명도 낙오자 없이 졸업시켜 보람
회고 에세이집 ‘학연가연’, 공정한 세상 만들기 위해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 담아 

 

[용인신문] 단국대학교가 서울 용산에서 용인 죽전으로 이전해 국내 최대 규모의 웅지를 튼 지 벌써 15년이 됐다. 장충식(91) 명예 이사장은 단국대학교 용인 이전을 이끈 주인공으로 수도권의 교육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 명예 이사장은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범정 장형(1889~1964) 선생의 아들로 창학 이념인 구국, 자주, 자립정신을 지키며 웅비하는 오늘의 단국대학교를 일궈냈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미국 유학 중이던 35세에 학장을 맡았고, 그 후 36세에 초대 총장에 오른 후 60년 세월을 단국대학교를 지키며 성장시키려고 고군분투했다.

초대 총장에 올라 글 쓸 여유가 없던 그가 최근 젊은 시절 하고 싶었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세 번째 소설 ‘눈물’을 펴낸 데 이어 ‘현모양처’를 집필 중이다. 원래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 럭비 선수를 하면서도 한국 · 세계문학 전집을 독파했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지난해 반백 년 넘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을 에세이로 엮은 『학연가연』을 펴내기도 했다. 에세이집에는 대학에서 맺은 학자, 고학생, 예술가, 정치인 등 20여 명의 인연과 함께 장 이사장이 단국대학교를 이끌어온 스토리가 고스란히 소개돼 있다. 물론 못다 실은 인연이 수없이 많다.

60년 장구한 세월을 민족 사학 단국대를 위해 걸어온 장충식 명예 이사장을 만나 학연가연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인간애에 바탕을 둔 교육철학과 경영철학은 감동이었고 한마디로 그는 위대한 산이었다.

 

 

-최근 근황부터 말씀해 주시죠.

현모양처라는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어요. 정치인들의 부인은 어떻게 생활하고 교수, 사업가의 부인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부인들이 남편이 벌어들이는 돈을 가지고 어찌 생활하고, 혹 부정한 돈을 거부할 수 있는 훌륭한 부인들이 있을까. 현모양처 타이틀 가지고 써보면 책을 보는 사람들이 내가 과연 현모양처인가 현모악처인가 느끼겠죠.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과연 우리나라 여성들의 힘이 어디에 미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해요. 저는 주로 인간의 도리에 대해 쓰고 있어요.

 

-용인 죽전에 내려오시는 과정이 쉽지 않으셨을 덴데요.

용인으로 오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죠. 어쨌든 용인으로 내려온 것은 큰 모험인데 서울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안목이 다 서울에 중심을 두고 있지 서울 주변을 발전시켜야 한국이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잘 안 해요. 학생들이 시골학교 된다면서 걱정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서울이 크게 발전되려면 이웃 용인이 발전돼야 한다.”라고 설득시켰죠.

 

-당초 학자를 꿈꾸셨던 것 같은데 대학에 몸담게 되신 계기가 있는지요.

한때 동양사학자나 기업경영가를 꿈꿨죠. 대학에 투신한 배경은 정치권력의 거대한 힘과 그 힘에 좌초할 수도 있는 사학의 숙명이 있었죠. 나는 28세에 설립자인 선친의 강권으로 학생 과장으로 전신해야 했어요. 당시는 우리 대학에 가장 혹독한 시련과 고통의 사건이었던 5.16 군사정변과 부친에 대한 정치적 모략에 의한 주간부 폐교가 있었어요. 1966년 35세에 학장의 보임을 받았어요. 만약 대학이 안정되고 강건한 교세를 가졌다면 난 대학에 남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좌초 위기의 대학을 일거에 전환시키는 방법은 종합대 승격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했고, 힘도 배경도 없던 제가 무작정 박정희 대통령과 줄이 닿는 분을 찾아가 결국 청와대에서 대통령 독대에 성공했죠. 젊은이의 패기만으로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며 겁 없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집을 팔아가며 교직원 월급을 주고 있는 억울한 사정을 풀어낸 후 대통령께 대학을 기증할 테니 잘 성장시켜달라고 했어요. 대통령은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가타부타 언급이 없었어요. 그 후 70여일 만에 종합대 승격을 실현할 수 있었고, 36세에 종합대학 초대 총장의 중임을 맡게 됐죠.

 

-제3 공화국 시절, 대단한 권력에 도전했고, 그 권력이 용납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종합대학의 거대한 뿌리는 내 비전에서 출발했지만, 그 자양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나에 대한 호의가 잠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회의원 제안 거절, 10월 유신 이후 야당 김상현 국회의원과의 친분으로 보안사령부에 연행돼 김대중 의원 정치자금 지원 혐의로 고문받은 일 등이 있었음에도 박 대통령은 대학 발전을 위해 열정을 바치는 저의 열정을 이해해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고사 위기에 처했던 대학을 종합대 승격과 천안캠퍼스 신설을 거쳐 한국 사학의 거목으로 성장시키게 한 데 대한 고마움이 크죠.

 

-박정희 대통령 외에 노태우, 김대중 대통령 등 정치 권력의 정치 권유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장관, 총리직 등 여러 권유가 있었지만, 총장직을 팔아 권력을 얻은 교육자로 남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학인으로 남아야 대학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었어요. 선친의 꿈, 박정숙 이사장님의 희망이었던 단국대 발전의 목표가 곧 저의 목표였으니까요. 최고 권력의 권유를 거부하는 것은 위태로운 것일 수도 있었지만 완곡하게 거절하기를 거듭하며 내 철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나를 이해해 준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북방정책, 남북통일 축구단일 팀, 한중수교 등 정부 일을 도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대 사범대 럭비부 선수였고, 노태우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럭비부 선수로 시합과 연습 등을 통해 학창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노 대통령 시절, 남북관계 일을 많이 하고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류가 전혀 없던 대한민국에 단국대가 처음 헝가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노 대통령을 소개해서 헝가리와 사회주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국교를 맺게끔 했어요. 한중수교도 최초로 맺었어요. 내가 정치인이 아니고 대학교수고 총장이었기 때문에 일이 성립될 수 있던 거에요. 그다음에 남북한 청소년들을 서로 교류할 기회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북경아시안게임에 갔을 때 북한 대사를 만났어요. 조용하게 만나서 장차 통일되면 남과 북의 청년이 서로 통일에 대한 걸 상의 할 수 있는데, 이번 대회에 참석했던 남쪽의 축구선수들을 김일성 주석이 좀 초청해서 품에 안아주실 수 없냐고 한번 여쭤봐 달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죠. 그런데 김일성 수령이 그 얘기를 듣고 남쪽 사람이 참 배통이 크다고 말씀이죠. 그래서 북경에 참석했던 선수단들을 다 평양에 보냈어요. 평양에 참석했을 때는 그 운동장에 관중이 꽉 찼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얼마나 소홀했냐면 잠실체육관 운동장에 빈자리가 많았어요. 빈자리가 많으니까 민족의 청년들이 이렇게 같이 만나서 축구 시합을 하고 서로 친선 교류를 하는데 얼마나 남쪽이 우리를 무시했으면 이렇게 빈자리가 많이 있냐고 했죠. 이런 걸 볼 때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많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남북한이 교류를 했어요.

 

-민간에서 남북 교류를 끌어내신 거네요.

그 바람에 그 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되신 다음 나 보고 당신이 대한적십자 총재를 맡아달라고 해서 총재가 되어 이산가족 상봉을 처음 성사시킨 거죠. 이희호 여사님 모시고 가서 북한에서 생산과 수입이 안 되는 진통제, 보청기를 전달했고, 앰블런스도 배로 실어 보냈어요. 남북한 간에 그러한 이해관계에 대한 경쟁적 차원이 아니라 동포애를 쏟아붓는 그런 자세를 보이니 나중에 통일축구 단일팀까지 만들었고요. 오로지 단국대학교 총장, 이사장 위치에서 일했죠.

 

-긴 시간 대학에 몸담아 오신 소회는 어떠신가요.

돌아보면 반백 년 넘게 대학에 몸담으면서 나 역시 배움터이자 삶터인 단국대학을 무대로 최선의 결과를 얻고자 고군분투했다는 점에서 여느 대학인과 다를 바 없어요.

 

-직접 저술하신 회고 에세이집 ‘학연가연’에 수많은 인연을 소개하신 것을 보고 따뜻한 인간애를 실천하신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소신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에요. 거대한 국가 권력에 박해받는 젊은이나 지식인, 원하지 않는 불리함으로 그늘에 살아야 하는 소외인, 재능이 있는데도 여건을 타고나지 못하고 기회를 얻지 못한 젊은이들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진정한 공정은 조건 없는 기계적 형평이 아니라 권력, 고정관념, 장애 등의 불리함을 극복할 힘을 보태주는 것으로 생각했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이고, 단국대학의 설립 정신이에요.

 

-지난 60년 동안 가장 큰 보람이라면 무엇인가요.

제가 보람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 많은 학생들이 저항했을 때 그들을 보호한 거예요. 유일하게 정부 말을 안 듣고 퇴학을 안 시킨 학교가 우리 학교에요. 감옥에 갔다가 오면 퇴학시키고 제적시켜서 대학을 다닐 수 없게끔 했는데 단국대는 한 명도 없이 다 졸업시켰어요. 그건 설립자의 정신이었어요. 제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교수가 챙기지만, 이념을 가진 아이들은 교수가 챙길 수 없다. 네가 이념을 가진 아이들을 보호해라.” 그게 설립자의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었죠.

 

-정부에서 그냥 놔두지 않았을 텐데요.

한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을 다 복학을 시키니까 중앙정보부에서, 문교부에서, 청와대에서 날 불러 가지고 넌 정부하고 무슨 원수졌길래 반정부 데모한 사람들, 3선 개헌 반대한 아이들을 복학시키느냐고 했죠. 저는 “제정신이 아니라 이 학교를 세운 분의 정신”이라고 했죠. 근데 박정희 대통령이 끝까지 제 고집을 안 꺾었어요. 봐줬어요. 효자라고요.

 

-국내 최고의 치과병원을 서울 아닌 천안에 개원하게 된 과정과 배경은 무엇인가요.

지난 1978년에 한국 최초로 지방에 단국대 천안캠퍼스를 개교했습니다. 천안은 정부의 수도권 분산 정책에 부합되는 도시였고, 지방에도 4년제 대학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당시 천안 사람들조차 무슨 천안에 대학을 만드냐고 할 정도였죠. 특히 치과병원을 짓는다고 하자 더욱 믿지 못했죠. 당시 구강 보건 인식이 열악하던 시절이었고, 이빨 의사라고 해서 일반 의사들이 치과 의사를 무시하던 시절이었죠. 국내 유수의 대학에 병원 설립 자문을 구해도 거절당해서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유명한 치과대학을 찾아가 한국에 유명한 치과 대학을 만들고 유명한 치과병원을 만들어 농촌에 있는 사람들의 구강 위생이 발전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했죠. 일본 교수가 적극 무료로 도움을 줘 단국대학교가 처음으로 전국에서 최고의 치과병원을 만들었어요. 단대 치과대학이 한국 치과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죠.

 

-저출산은 대학경영에도 어려움인데 지혜로운 타개책이 있다면요.

국가에서 장려해 장학금을 많이 풀어서 교육 부담을 정부가 책임지게 해줘야겠죠. 국가의 지원으로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닐 수 있을 때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다시 태어나면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지금 내가 90살이 넘었거든요. 한 열권을 쓰고 돌아갈까 생각해요.

 

-끝으로 젊은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같이 의논하고, 싸우지 않고, 서로 지혜와 지식을 주고받으면서 이 세상을 꾸려갈 수 있는 그런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대담: 글: 박숙현 기자/ 사진: 김종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