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나는 큰 나무를 보면 설렌다. 훌쩍 뛰어 올라가고 싶기도 하고 곁에 누워 자고 싶기도 하다. 적당하게 큰 나무 말고 누가 봐도 수령이 100년은 넘었을 거 같은 나무. 이리저리 휘어있는 나무. 당산나무 같은 나무들을 보면 맘이 편해진다.
그런 나무 앞에 서 있는 어린 나를 그리고 싶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에 햇빛이 드는 오후. 깊은 숲에 호기심 넘치는 개구진 아이 하나.
[용인신문] 나는 큰 나무를 보면 설렌다. 훌쩍 뛰어 올라가고 싶기도 하고 곁에 누워 자고 싶기도 하다. 적당하게 큰 나무 말고 누가 봐도 수령이 100년은 넘었을 거 같은 나무. 이리저리 휘어있는 나무. 당산나무 같은 나무들을 보면 맘이 편해진다.
그런 나무 앞에 서 있는 어린 나를 그리고 싶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에 햇빛이 드는 오후. 깊은 숲에 호기심 넘치는 개구진 아이 하나.
용인신문 | 봄이 되면 생각나는 시집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선물해주셨던 시집이다. 이문재 시인의 <지금 여기가 맨 앞>. 10년 만에 나온 시인의 시집은 잘 농축되어 있었다. 그 시들을 읽고 봄을 더 자주 관찰하게 되었다. 연초록빛 새싹들이 돋아나는 것부터, 산수유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노란 꽃을 피우는 것, 말간 연두색 빛들이 조금씩 연초록으로 변하는 것까지 본다. 새로 난 잎은 반짝이고 연하다. 조금 말려있다. 다음날 가서 다시 보면, 말려있던 잎이 펴져 있다. 반짝임은 조금 가셨지만 여전히 다른 잎들과 비교해서는 더 연한 초록색이다. 초록의 변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여름이 온다!
용인신문 | 혼자 살게 되며 가장 즐거운 것은 내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조용한 집안이라는 것. 자극에 약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쉽게 집중이 깨지고는 했다. 깨끗한 책상과 고요함이 날 건강하게 한다. 주의는 기울이되 반응은 없이. 말없는 소리, 내용없는 감정. 소음없는 신호 외부의 소음을 끊고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흔들린다. 어느날, 불안하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단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절되면 고립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모든 순간에 연결되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할 시간을 확보하라고 하셨다. 온라인에서 벗어나 오프라인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나는 새벽을 잘 이용한다. 사람들이 잠들고 나면 고요한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꺼두고 30분쯤 지나면 나만의 시간이 온다.
용인신문 | 요즘은 낮잠을 잘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가끔 낮잠을 자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주말 오후 3~4시쯤 빛이 길게 집에 들어오는 때엔 나른해지면서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신나게 놀다가 집에 들어와서 한숨 자면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를 깨웠다.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들을 들으며 일어났었다. 낮에 꾸는 꿈은 밤의 꿈보다 더 허무맹랑하고 달달하다. 그런 꿈을 꾼지가 언제인지! 다음 주말에는 오랜만에 낮잠을 자야겠다.
용인신문 | 어떤 일을해도 힘을 빼는 것이 최종 숙제가 아닐까. 잘해내고 싶은 일 앞에서 긴장되고 힘도 잔뜩 들어간 내 모습을 본다. 힘은 뺄수록 좋다. 대충한다는 말이 아니다. 의외로 힘빼는 게 더 어렵다. 수영을 오랜만에 하러 가면 온몸에 힘을 준다. 그러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앞으로 밀어내는데 쓰여야 할 에너지가 낭비되기 때문이다. 두어바퀴 돌고나서 몸이 지치면 그때야 비로소 꼭 필요한 때에만 힘을 주게 된다. 행동 사이사이 불필요한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힘을 줄때와 놓을때를 알고 흐름을 만들어 가야한다. 어깨에 잔뜩 들어간 긴장을 몸을 털어 떨어낸다. 찰랑찰랑 물이 흔들린다.
용인신문 | 친구가 자꾸 죽는다. 그만 잃고 싶다. 지금껏 몇몇 장례식장에는 가지 못했고 갈까말까 저울질하기도 했다. 그리곤 곧 후회했다. 되돌릴 수는 없었다. 후회보단 방문이 낫다. 그리고 방문보다 중요한건 기억이다. 처음엔 죽은 이를 위해 방문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장례식장은 산 자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이를 보낸 친구가 걱정되어서 방문하고, 소중한 친구를 잃은 내가 걱정되어서 방문하는거라고. 첫 이별엔 얼떨떨했고 각자 아파했다. 두번째 이별엔 더 많이 아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번째 이별엔 찾아가지 않았고 후회했다. 네번째 이별에는 찾아가 울었다. 이번엔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만나면,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을 나눌것이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하며 살려고 한다.